포세(浦稅)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① 해세의 다른 말.

② 포구세의 준말로, 포구에 들어온 화물에 부과하던 세.

개설

① 균역법 시행으로 양역의 부담을 1필로 균일화한 후,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균역청에서 관리·수세하게 한 어염선세를 말하였다.

② 포세는 지방의 포구에 반입된 화물(貨物)에 부과하던 세금으로, 균역법 성립 이후 특히 19세기 들어 보편화되었다. 균역법 성립 이전에는 어선이나 상선에 대하여 궁방, 아문 등 여러 기관에서 각종 명목으로 중복 수세하여, 포구세(浦口稅)라는 범주가 독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첩세현상은 균역법의 성립으로 선세(船稅)의 범주가 성립되면서 일단 해결되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 상품경제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포구로 반입·반출되는 화물이 증가하고, 그에 따른 상업 이윤의 일부를 포구세로 수취하여 재원에 보충하는 경향이 증가하였다.

내용 및 특징

균역법 성립 이후, 특히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포구의 상품유통을 여객주인이 독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포구의 여객주인들은 잡역(雜役)을 면제받고 상품유통의 독점을 보장받기 위하여 포구세를 부담하였다. 이때 세금을 거두는 주체는 동내(洞內)·군현(郡縣)·감영(監營) 등이었고, 포구세는 이들 기관의 재원이 되었다. 포구세는 여객주인이 선상(船商)에게 수취한 구문 중에서 일부를 상납하는 것이었다. 세액은 정액제로 약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순천 신성포(新成浦)처럼 구문 수입의 40%를 포구세로 징수하는 정률제인 경우도 있었다.

변천

19세기 들어 지방에 있는 포구에서 포구세의 징수가 일반화되자, 궁방·아문 등에서도 포구세를 절수하고자 하였다. 궁방·아문에서는 포구 자체를 절수받아 수세권을 행사하였는데, 이 경우 지방관의 수세 권한은 궁방·아문에게 넘어갔다.

또 다른 경우는 궁방·아문이 포구세에 대한 권리를 절수받는 경우였다. 이는 지방관이 수세하던 포구세에 다시 궁방·아문이 부과하는 포구세가 가중되는 것이었다. 후자의 방식은 대원군 집권기와 개항기에 일반화되어, 여객주인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여객주인들은 중복되는 포구세의 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기관의 침탈을 막아 주는 보다 센 권력기관에 투탁하여 포구세를 상납하는 형식으로 대응하였다.

참고문헌

  • 고동환, 『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 이영호, 「19세기 포구수세의 유형과 포구유통의 성격」, 『한국학보』 41, 일지사,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