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세자(廢世子)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418년(태종 18) 6월에 태종이 학문을 멀리하고 실행을 계속하여 세자로서의 품위와 자질을 상실한 세자 이제를 폐한 사건.

개설

1404년에 원자(元子) 이제(李禔)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는 책봉된 1년 후부터 글을 암송하지 못하여 태종이 관련자들을 문책하였다[『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세자는 놀기를 좋아하고 완물(玩物)을 즐겼을 뿐 아니라 잡인들을 끌어들여 잡희(雜戱)를 즐겼다. 국정에 참여하고 있었으면서도 중신(重臣)의 첩을 취하는 등 엽색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 때마다 주변 인물들이 처벌 받았다.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것을 종묘에 고하고 맹세까지 하였지만, 세자의 행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통교를 금한 첩을 비밀리에 만난 것을 질책한 태종의 처분과 처사에 대해 원망·협박하는 상서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태종은 더 이상 세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세자를 폐하였다(『태종실록』 18년 6월 3일).

역사적 배경

태조가 서열이나 정통성에 전혀 맞지 않는 8남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태종은 자신의 이복형제 간의 권력 투쟁을 경험하였다. 태종의 즉위도 정통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세자 책봉의 중요성을 절감하였고, 그래서 9세 때 장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원자로 삼고, 2년 뒤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번번이 학문을 기피하였고 놀이를 좋아하였으며 궁중 잡인들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엽색 행각도 끊이지 않았다. 장성할수록 그의 실행(失行)은 더욱 심해졌고, 그 때마다 주변인들이 처벌 받거나 징계를 당하였다. 1409년에 조계(朝啓)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정사를 본 이후(『태종실록』 9년 8월 22일), 세자는 폐세자가 되기 전까지 상황에 따라 정사(政事)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학문에 태만하고 완물을 즐기는 세자에 대해 불만을 가진 태종은 1413년 8월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매를 달라 하여 즐긴 사실을 알고 세자의 환관들을 처벌하였다. 이에 대해 분노한 세자가 단식으로 불만을 표출할 때, 태종은 처음으로 세자를 폐할 수 있다는 의중을 드러내었다.

발단

세자를 바로잡기 위해 서연(書筵) 금지, 출입자 금지, 서연관 질책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세자의 태학(怠學)·정학(停學)하는 성향은 계속되었고, 잡기·여색을 즐기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1416년에는 선공부정(繕工副正)구종수(具宗秀)와 악공(樂工)이오방(李五方)이 궁에 들어가거나, 그들의 집에 세자를 초대한 일들이 발각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구종수 3형제와 이오방은 사형당하였다(『태종실록』 17년 3월 5일). 이 일 후 세자는 개과천선할 것을 다짐하였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1417년에는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당부한 왕실의 비밀 계보인 왕친록(王親錄)을 열어 보았고, 며칠 후에 전중추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를 취한 것이 알려졌다(『태종실록』 17년 2월 15일).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이 하옥되었고, 이제까지 달라질 것을 기대하며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던 태종은 세자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과

신료들이 세자의 실행을 개진하였고, 세자는 개과천선할 것을 종묘에 고하겠다고 하였다(『태종실록』 17년 2월 17일). 그러나 그 후에도 세자는 병을 핑계로 정강(停講)하고 활쏘기를 하였다. 또 다른 엽색 행각이 드러나 관련된 인물들이 참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인한 충격으로 세자는 이상 행동 증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1418년 3월에는 통교를 금한 어리를 다시 만난 일이 드러났다. 그 일을 묵인한 세자 장인 김한로(金漢老)가 유배되었고, 서연과 숙위사(宿衛司)는 혁파되었다. 옥사도 여러 차례 있었다. 세자는 글을 올려 부왕의 행적을 거론하여 비교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등 분노를 드러내었다. 태종은 세자의 상서 내용을 신료들에게 보이고 세자 문제를 논의하여 세자를 폐하는 수순을 밟았다(『태종실록』 18년 6월 3일).

세자를 폐위한 데에는 1412년에 16세 때 충녕대군으로 봉해진 태종의 셋째 아들의 부상이 있었다. 태종은 그의 학문적 성취에 만족하였고, 대사(大事)에 임하여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태종실록』 16년 2월 9일). 세자가 더 이상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품위를 실추하자, 태종은 학문이나 도덕성에서 세자보다 우위에 있었던 충녕대군을 ‘택현(擇賢)’의 명분으로 세자에 책봉하였다.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
  • 이완재, 『(실록)효령대군 일대기 1: 정효공 이보의 생애와 행적』,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3.
  • 지두환, 『태종대왕과 친인척 1: 태종세가』, 역사문화, 2008.
  •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연구』, 지식산업사, 2002.
  • 박홍규·방상근, 「태종 이방원의 권력 정치: ‘양권’(揚權)의 정치술(政治術)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104, 2006.
  • 최승희,「태종말 세자폐위사건의 정치사적 의의」,『이재룡박사환력기념논총』,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