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설(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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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 떠도는 짤막한 이야기.

개설

패설(稗說)은 원래 패관(稗官)이라는 관직의 하급 관리가 수집한, 민간에 나도는 풍설이나 소문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점차 소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패설은 패관(稗官), 고설(古說), 고담(古談), 패관소설(稗官小說), 패관소품(稗官小品), 언패(諺稗) 등의 용어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수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을 비롯해 각종 영웅소설, 「평산냉연(平山冷燕)」 등과 같은 중국소설, 청나라에서 수입된 패관소품 등을 모두 패설이라 지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패설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과거 시험에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문체, 못난 사람이 심심풀이로 삼는 것, 세도(世道)를 해치는 것 등으로 여겼다. 이처럼 패설은 경전이나 역사서와 대비되는 것, 순정하지 않은 문체로 쓰였을 뿐 아니라 불경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패설을 읽는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급기야 과거 시험에 패설에서 읽은 내용을 쓰거나 패설의 문체를 사용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합격한 과거 시험 답안에 패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논란이 일면서 패설은 사회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1710년(숙종 36)에 사간원에서는 한 과거 응시자의 시권 즉 답안에 ‘서포패설(西浦稗說)’이 포함되어 있다고 논핵하였다. 이때 ‘서포’는 김만중을 가리키고, 패설은 ‘붓이 돌아가는 대로 쓴 소설 같은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격식 외의 어수선하고 난잡한 글은 엄단해야 한다며, 해당 응시자를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할 것을 건의하였다(『숙종실록』 36년 5월 21일).

패설이 더욱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정조대였다. 정조는 패관잡설·패관잡기·패관소품체 등의 용어를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하였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에 내린 하교에서, 패관잡설은 세도에 해로운 것으로 근래의 문체가 경박하고 촉급한 것은 다 잡서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정조실록』 11년 10월 10일). 또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지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지하려면 명말 청초의 문집들부터 금지시켜야 한다며, 패관잡기를 서양학이나 명말 청초의 문집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그 뒤 1792년(정조 16)에는 문풍이 날로 비속해지고 있다면서, 과거 시험에 사용된 문장조차도 패관소품의 문체를 모방하고 있어서 경전의 중요한 의미들은 소용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고 개탄하였다.

이처럼 패설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정조는 패설 문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중국에서 책을 들여오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균관 시험의 답안 중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된 답이 있으면 전편이 아무리 좋더라도 가장 낮은 성적인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해 과거를 보지 못하게 조치하도록 했다. 이때 거론된 인물이 유생 이옥(李鈺)이다. 정조는 이옥의 응제 글귀들이 순전히 소설체로 이루어져 있다며, 매일 사륙문 50수를 짓게 해서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옥에 이어 정조의 지목을 받은 사람은 남공철(南公轍)이었다. 정조는 남공철이 쓴 대책(對策) 중에 소품을 인용한 구절이 몇 있다고 지적하고, 문체를 바로잡기 전에는 궁궐에 들더라도 경연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지제교 직함도 떼게 하였다(『정조실록』 16년 10월 19일). 뒤이어 이상황(李相璜)도 소품을 쓴 사람으로 지목되었다(『정조실록』 16년 10월 24일). 정조의 이러한 조치들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불리는데, 이옥·남공철·이상황 외에 박지원·박제가·성대중·이덕무 등도 정조의 견책을 받았다.

패설은 살인 사건과 관련되기도 했다. 1790년(정조 14)에 전라도 장흥 사람 신여척(申汝倜)은 이웃집 형제가 싸우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해 그중 한 명을 발로 차서 죽였다. 형조에서 심문하고 법에 넘길 것을 청하자, 정조는 항간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종로의 연초 가게에서 소사패설(小史稗說)을 듣다가 영웅이 실의한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낫을 들고 앞으로 달려들어 책 읽던 사람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정조는 이렇게 맹랑한 죽음도 있으니 가소롭다고 평하면서, 그에 비해 신여척은 재물 때문에 병든 아우를 구타한 모진 형을 보고 의로운 마음에서 나섰고, 그 결과 비고의적으로 살인이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를 방면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정조가 언급한 사건은 그 당시에 꽤 유명한 사건이었던 듯, 이덕무의 「은애전」과 심노숭의 산문에도 등장한다. 심노숭은 어떤 이가 서울 연초 가게에서 국문소설 「임장군전」을 낭독하는 것을 듣다가, 김자점(金子點)이 임장군에게 없는 죄를 씌워 죽이는 대목에 이르러 분기가 솟아올라 담배 써는 칼로 낭독하던 사람을 미친 듯이 베어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정조 사후에도 패설은 수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1839년(헌종 5)에 우의정이지연(李止淵)이 패설 및 잡서에 관계된 것은 일체 가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금지품 절목[禁物節目]에 넣을 것을 청했다는 기사(『헌종실록』 5년 7월 25일)로 미루어, 패설은 계속해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880년(고종 17)에는 허원식(許元栻)이 상소를 올려 학문이 사라지고 글 읽는 사람이 없어졌음을 지적하면서, 사람들이 패설을 심심풀이로 삼는다고 언급하였다(『고종실록』 17년 11월 11일). 이 기사를 통해 패설이 광범위하게 읽히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경미, 『소설의 매혹』, 월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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