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관소품(稗官小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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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수필 따위의 가벼운 한문 문체.

개설

패관소품(稗官小品)은 소설이나 수필과 같은 가벼운 한문 문체로, 조선시대의 정통 산문 문체인 고문(古文)과 상대되는 개념이다. 소품 또는 패관잡기(稗官雜記), 소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조선시대 후기에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이는 고전 소설의 향유와 창작 및 산문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조대를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이 문체가 정치적·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문사들에 의해 창작된 소품문(小品文)과 장편 소설인 『수호지』·『금병매』를 비롯한 사대기서(四大奇書), 『서상기(西廂記)』와 같은 희곡 등이 널리 읽히면서 조선 문단에서 그를 모방한 문체가 나왔으니, 이것이 패관소품이다. 패관소품은 민간은 물론이고 특히 경화세족(京華世族) 문사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패관소품을 쓴 주요 작가로는 박지원(朴趾源), 이옥(李鈺) 등이 있고, 그밖에 서울과 그 주변 지역 문사들 중에도 패관소품을 쓴 작가가 많다.

패관소품은 기존의 고문과는 여러 측면에서 다른 까닭에 고문을 숭상하는 작가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켜 사대부 집단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정조는 기존의 문체와 사고방식, 풍속을 해치는 불순한 문체라고 판단하여 문체반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패관소품의 개념과 범주

패관소품은 소설이나 야담 같은 서사물이나, 생활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낸 소품문을 가리킨다. 패관이 주로 이야기로서의 소설 문학을 의미한다면, 소품은 길이가 짧고 주제가 가벼우며 감성적인 산문 문장을 뜻한다.

본래 유가에서는 이른바 ‘문이재도(文以載道)’라 하여 도(道)를 담은 문학을 창작하려는 것이 주류였다. 조선시대 산문의 주류 역시 이런 내용의 글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청나라 및 18세기 조선에서는 이런 도를 담은 문학의 범주와 심미안에서 이탈하여, 인생의 취미와 감성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학이 발달하였다. 시민사회의 성장이 기반이 되어 나타난 산문의 새로운 경향이었으며, 제재나 심미안, 풍격 등에서 고문과는 다른 이질적인 문체였다. 중국의 경우 『서유기』·『수호지』·『삼국지연의』·『금병매』 등의 사대기서를 비롯한 소설 문학과, 『서상기』 등의 희곡 문학, 공안파(公安派)와 경릉파(竟陵派)에 속한 작가들의 소품문, 김성탄(金聖嘆)의 비평문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조선의 경우 정조 연간에 이옥·박지원·이용휴(李用休)·이덕무(李德懋) 등의 작가가 출현하여, 고문의 세계와는 다른 참신한 문체를 보여 주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이옥의 『봉성문여(鳳城文餘)』 등을 꼽을 수 있다.

2. 패관소품의 형성과 유행

패관소품이 조선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영조 말엽이다. 경화세족 문사들이 오랜 기간 큰 세력을 지녔던 고문의 문체에서 벗어나, 청나라에서 들여온 명청 시대의 소품문과 소설 등을 탐독하면서 새로운 문체를 실험하기 시작하였다. 이지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고문과 달리 감성적인 글쓰기를 지향함으로써 과거의 문체와는 색다른 특징을 보여 주었다. 이 문체는 작자의 독특한 주관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감성적인 산문으로 시민들의 역동적인 삶과 의식을 반영하였다. 『정조실록』에는 패관소품에 물든 인물로 이옥·이가환(李家煥)·남공철(南公轍) 등을 거론하며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가 실려 있다(『정조실록』 16년 10월 19일) (『정조실록』 16년 11월 6일).

소품문 작가들이 등장함에 따라 문단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문체는 도회지의 젊은 문사들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가 무시하지 못할 조류로 부각되었다. 소품문은 참신성과 역동성을 지닌 산문으로, 이들 소품문의 작가들은 정조 대에 담론 형성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단순히 산문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당시 지식인 사회의 사유와 깊은 관련을 맺으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지식인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되면서 패관소품의 영향력이 감소하였으나, 그에 대한 문인들의 관심은 일정하게 지속되었다. 창작의 열기 역시 18세기만큼 역동적이지는 못했지만, 조희룡 같은 문인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3. 정치적 반향과 문체반정

패관소품은 주제와 소재, 창작 태도 등에서 조선시대 사대부의 정통 문체인 고문과는 다른 특징을 지녔다. 그 내용과 지향이 겉으로는 조선 왕조의 기본적인 틀을 준수하고 있으나, 그 안에는 자유로운 연애, 자연과학적 사유, 시민사회의 자유분방함, 틀에서 벗어난 일탈 행동에 대한 긍정, 서학(西學)에 대한 관심, 외국에 대한 동경 등 기존의 문학이 보여 주는 주제와는 다른 참신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 새로운 세계의 묘사는 보수적인 고문 창작가나 정치가들에게는 체재를 위협하는 불온한 문체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패관소품이 유행하면서 그 문체적 특징이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인 과문(科文)에까지 파급되고, 명문가 출신의 젊은 관료들이 제출한 책문(策問)이나 성균관 유생의 문장에서도 그 영향이 발견되었다. 사적인 문장뿐 아니라 공적인 문장에까지 패관소품의 영향력이 미치게 된 것이다. 정조는 이렇게 새로운 문체가 급속도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핵심적인 문사들이 그 문체에 젖어 들어가는 현상을 우려하였다. 패관소품이 사람의 심술(心術)에 큰 해악을 끼친다고 여겼기 때문에, 문장과 경술(經術)에 뜻을 둔 선비가 그런 조류에 물드는 현상을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에 따라 정조는 패관소품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여 문체반정이란 정책으로 실현하였다.

패관소품의 확산을 막으려는 정조의 대책은 여러 방향에서 시행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그와 같은 문체를 사용하는 문장가들을 제재하였다. 이상황(李相璜)·김조순(金祖淳)·남공철 등의 경화세족 명문가 출신 관료를 견책하였고, 성균관 유생 이옥을 성균관에서 축출하였으며, 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에게는 반성문을 제출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이 문체가 유행하는 것은 명·청 시대의 소품서가 조선으로 유입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연행(燕行) 사절단을 철저히 조사하고 감시하여 청나라로부터 소품서와 서학서, 사치품이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1792년(정조 16)에 동지정사(冬至正使)박종악(朴宗岳)에게 당판(唐板)의 모든 서적을 철저히 조사하여 들여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정조실록』 16년 10월 19일).

한편, 패관소품은 정적을 공격하는 빌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792년에 소론인 이동직(李東稷)은 남인 관료인 이가환을 공격하는 근거의 하나로 패관소품의 문체를 거론하였다(『정조실록』 16년 11월 6일).

패관소품은 정조대를 전후한 시기에 조선시대의 주류 문체인 고문과는 다른 문체로 등장하여, 문학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 과학과 종교 분야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역사적인 현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 『홍재전서(弘齋全書)』
  • 『연암집(燕巖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금릉집(金陵集)』
  • 이가원, 『燕巖小說硏究』, 을유문화사, 1984.
  • 안대회 엮음, 『조선후기 小品文의 실체』, 태학사, 2003.
  • 안대회, 「정조의 문예정책」, 『장서각』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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