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개(筒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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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집인 궁대(弓袋)와 화살집인 시복(矢箙)을 결합하여 만든 활화살통.

개설

활화살통으로 활집인 궁대와 화살집인 시복을 결합하여 만들었다. 고건(櫜鞬), 동아(筒兒), 궁시대(弓矢袋)라고도 한다. 조선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창복이라고 하며, 창은 활을 넣는 활통이고 복은 화살을 넣는 화살통이라고 정의했다. 동개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통개(筒箇)라는 용어는 우리말을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의장용 활은 궁대에 넣었을 때 반만 들어가고, 대개 기패 같은 의장용 화살을 시복에 꽂았다. 화살을 넣는 집이 부착된 것과 따로 떨어진 것이 있는데, 화살집이 따로 떨어진 것은 끈으로 연결되었다.

연원 및 변천

통개는 4세기 중엽의 고구려 고분벽화인 안악3호분의 행렬도에서도 볼 수 있어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남아 있는 유물을 보면 금동제와 철제가 있으며 곡선형 금속장식이 달려 있다.

조선시대에 세조의 대상(大祥) 뒤로부터 예종의 소상(小祥) 전까지는 대전(大殿) 칼집은 검은 술을 드리우고, 통개는 연록비(煙鹿皮)로 쌌다는 기록이 있어 사슴가죽으로 통개를 장식한 것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1년 8월 17일).

평안병사에게 지급하는 물품의 품목에도 포함되었고(『중종실록』 23년 2월 3일), 위의(威儀)에 관한 여러 도구에도 활집[弓帒]·통개가 포함되었다(『명종실록』 12년 7월 12일). 근무실적 평가인 전최(殿最)에서 성과를 보인 수령들에게 활과 화살과 통개를 상으로 베풀었다(『고종실록』 3년 6월 18일).

위의(威儀)에서 동개가 검으로 바뀐 것은 1882년(고종 19) 이후로, “향후에는 동가(動駕)할 때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은 융복(戎服)과 통개는 착용하지 말고 흑단령(黑團領)에 검(劍)을 차게 하라.”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종실록』 19년 8월 6일).

형태

버선과 모양이 비슷하다.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가장자리는 실로 장식하고 쇠를 부착하였다. 길이는 30~41㎝, 너비는 15~21.5㎝ 내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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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순규 외, 『韓國의 軍服飾發達史』, 國防軍史硏究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