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예(親刈)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친예 |
한글표제 | 친예 |
한자표제 | 親刈 |
상위어 | 길례(吉禮) |
하위어 | 동적전(東籍田), 서적전(西籍田), 관경(觀耕), 노주연(勞酒宴), 선농단(先農壇) |
동의어 | 친림관예(親臨觀刈), 관예(觀刈) |
관련어 | 친경(親耕), 장종(藏種), 헌종(獻種), 신농씨(神農氏), 후직(后稷) |
분야 | 왕실/왕실의례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후기 |
왕대 | 조선 후기 |
집필자 | 신명호 |
시행시기 | 보리 수확시기 |
시행장소 | 적전(籍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친예(親刈) |
조선 후기에 국왕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적전(籍田)에 친림하여 보리 베는 것을 관람하던 의례.
개설
친예는 친림관예(親臨觀刈)의 줄임말로서 왕이 친림하여 곡식을 베는 것을 관람한다는 의미이다. 왕의 친예는 친경과 짝을 이루던 의례로서 친경이 파종 의례인 반면 친예는 수확 의례였다. 친예와 친경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농경의례로서 조상 숭배 정신과 권농의 기능을 같이 겸하는 통치자의 중요한 행사였다. 친예의 의식은, 행사 전에 농사를 처음 가르친 고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선농단(先農壇)에서 제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연원 및 변천
한국사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입춘 후 해일(亥日)에 선농(先農)에 제사하고 입하 후 해일에 중농(中農)에 제사하고 입추 후 해일에 후농(後農)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고려 시대에는 983년(성종 2)에 비로소 적전을 두고 친경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 국왕의 친예는 없었다.
조선 시대 들어 친경에 관한 의례가 자세히 정비되지만 친예에 관련된 의례는 정비되지 않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영조는 1739년(영조 15)에 재위 중 최초로 친경 의례를 거행한 이후 총 4차례에 걸쳐 친경을 거행하였는데, 1747년(영조 23)에는 적전에서 재배한 보리를 베는 것을 왕이 직접 참관하는 행사인 ‘관예(觀刈)’ 즉 친예를 거행하였다. 이때의 친예가 『국조속오례의』에 ‘친림관예의(親臨觀刈儀)’와 ‘관예후노주의(觀刈後勞酒儀)’ 항목으로 실렸다. 이후 거의 매년 이 행사가 계속되어 고종조까지 이어졌다. 친예 의례는 명(明)나라 선종(宣宗) 때의 고사를 원용한 것으로 친경 행사를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국왕이 관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장종(藏種)과 헌종(獻種)으로 이어지는 친경 의식의 연속선상에서 친예 의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영조대에 왕세손으로 친경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던 정조는 친예는 거행하였으나 친경을 거행하지는 않았다. 고종조에는 친경과 친예를 한 차례 거행하였으며, 순종은 1908년(순종 2) 4월 5일에 동적전에서 친경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이 해 7월 23일에 국가사전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선농단이 사직단에 합사되고 제단과 부지가 국유로 이속되면서 선농단 제사는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선농에 제향한 후에 친경하던 의식에서 친경만 남게 되었다. 더구나 행사가 끝난 후 순종이 뽕나무, 솔나무, 전나무 등의 나무를 심고 각 대신과 황족들도 따라 심는 행사가 곁들여짐으로써 친경례는 농업과 함께 임업을 권장하는 행사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 되면서 이 같은 친경의례마저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은대조례(銀臺條例)』에 의하면 적전(籍田)의 곡식이 익으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친예(親刈) 여부를 품지(稟旨)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는 국왕의 친예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 왕의 뜻에 따라 가변적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규정이었다. 친예하기로 결정하면 왕은 친예 직전에 동적전에 행차하여 선농단에서 제사를 올렸다. 이때 왕은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었다.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왕은 동적전에 마련된 관예대(觀刈臺)로 옮겨 보리 베는 것을 관람하였다. 보리는 청의(靑衣)와 청건(靑巾)을 착용한 서인(庶人) 40명이 독시관(督視官)의 감독하에 각기 기계(器械)를 잡고 동·서로 나뉘어 밭이랑으로 들어가 차례로 두 사람이 나란히 베었다. 보리를 벨 때, 독시관이 동·서에서 서로 향하여 서면 음악이 연주되고, 베기를 마치면 음악이 그쳤다. 벤 보리는 죽상(竹箱)에 담아 왕에게 올렸다. 곡식을 살펴본 임금은 죽상을 근시에게 주어 태상(太常)에서 보관하게 하였다. 이 곡식은 제사용으로 이용되었다. 왕이 곡식을 살펴보는 절차가 끝나면 보리를 벤 40명이 관예대 아래로 와서 네 번 절하였다. 왕이 술과 음식을 하사하여 참여자들의 수고를 위로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친예 의례는 종료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국왕의 친예 때 백성들에게 하사한 음식이 농민들에게 퍼져 설렁탕으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親耕儀軌』
- 『國朝續五禮儀』
- 『銀臺條例』
- 박소동, 「친경친잠의궤 해제」, 『국역친경친잠의궤』,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