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사고(忠州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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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및 조선전기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충청도 충주에 설치한 사고(史庫).

개설

충주사고는 고려시대에 설치되었다. 원래 개경에만 두었던 사고를 지방에 추가로 두었던 것은 몽고 침략 이후의 일이다. 고려 초기 거란의 침입 때 고려 초기 7대 실록을 소실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 침략 후에 조정에서는 실록의 안전한 보존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고려시대에 해인사(海印寺)에 처음으로 외사고(外史庫)를 설치하고, 귀중한 서적과 문서를 보관하였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책판의 보존 경험이 있었고, 또 북쪽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서해와 남해연안과 인접한 내륙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졌기 때문에 충주개천사(開天寺)에 사고를 마련하고 해인사사고에 보관된 서책 등을 옮겨 보관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사고와 충주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여 운영하였다. 1497년(태조 6) 경복궁을 지어 한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충주와 한양의 춘추관 두 곳에 사고를 두었고, 다시 1439년(세종 21)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새로 사고를 증치하고 그 각각에 모두 『조선왕조실록』과 주요 문서 등을 봉안하였다(『세종실록』 27년 11월 19일).

위치 및 용도

고려시대에는 충주개천사에 서책을 소장하였지만, 조선시대 들어와 충주 관아 동남쪽에 사고를 두었다. 충추사고는 1439년(세종 21)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외사고가 설치될 때까지 유일한 외사고였다.

변천 및 현황

1412년(태종 12) 4월에 사관을 보내 충주사고에 소장된 서책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대부분은 고려시대 때 출간된 책이었을 것이다. 이 중 도참서는 태워 버리고 나머지는 춘추관에 보관하였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춘추관이 소실되면서 이들 서적도 모두 불탄 것으로 추정된다.

1439년 이후의 조선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사고, 지방의 충주·성주·전주사고 등 4 사고가 설치되어 서책을 보관하였는데, 그 각각에는 고려의 서책과 함께 세종초까지 편찬되어 4부가 필사된 『태조실록』 15권, 『공정왕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 각 1부씩이 보관되었다. 성종 때 『조선왕조실록』 정본은 필사가 아닌 인쇄로 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그동안 한 부만 필사하여 보관하던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은 모두 활자로 출판하여 이 4사고에 1부씩 보관했다.

충주사고는 1592년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었고, 임진왜란 뒤에는 임진왜란 중에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본 『조선왕실록』을 저본으로 새로이 인쇄할 교정본을 편찬하고, 교정본 3부를 인쇄한 후 확보된 『조선왕조실록』 5부를 춘추관사고와 보관의 안전을 고려하여 새로이 건립한 오대산·태백산·마니산(뒤에 정족산으로 이전)·적상산에 보관함에 따라 복원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충주사고는 현재 사고지의 흔적도 확인할 수 없다.

형태

실록각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은 넓게 트였으며 2층은 사다리를 통해 올라갔다. 사다리는 돌 위에 세워져 있었고 건물 주위에 담을 쌓았다. 담 밖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소초(巢草)[[[화소(火巢)]] 안의 풀. 화소는 산불을 막기 위하여 능·원·묘의 해자(垓子) 밖이나 기타 중요 시설의 경계선 밖의 풀을 불살라 버린 곳]가 있었고, 군인들의 초소가 담 밖에 세워져 있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사편찬위원회 편, 『사고지(史庫址) 조사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1986.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 정구복,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 한우근, 「조선 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관한 연구」, 『진단학보』66,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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