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도회(春秋都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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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도와 지방에서 사학(四學) 및 향교 유생들의 면학을 장려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열었던 일종의 집중 수학 과정.

개설

춘추도회는 고려 때부터 실시되었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 폐지하였다가 성격을 바꾸어 다시 시작하였다. 수도에서는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생도, 지방에서는 향교의 생도들을 대상으로 봄·가을 두 차례 혹은 여름 한 달 도회를 열었다. 여기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는 소과 응시 때에 향시를 면제하거나 도회에서 취득한 점수를 가산하였다는 점에서 춘추도회는 학교 제도와 과거 제도의 연결 고리 구실을 하였다. 조선후기에 사학합제(四學合製), 공도회(公都會)로 바뀌어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고려에서는 1139년(고려 인종 17) 사학(私學)의 유생을 포함한 서울 유생들의 도회를 국자감 책임하에 50일간 열어 주로 시(詩)를 공부토록 하였다. 1142년의 규정에 의하면 중앙의 유생은 겨울과 여름의 도회에, 지방 유생은 계수관(界首官) 도회에 참여해야만 제술업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조선의 경우 춘추도회는 『경국대전』「예전(禮典)」장권(獎勸)조에 “사학(四學)의 생도 각 20명씩을 택하여 매 6월에 남학(南學)에 모아 3품 이하의 문관 3명이 강론 혹은 제술로 시험하여 우등자 10명을 생원시 혹은 진사시의 복시에 바로 응시[直赴]하게 한다. 여러 도의 관찰사는 도내의 교생을 헤아려 택하여 매 6월에 도회소를 설치하고, 문관 3명(교수 혹은 한산인)이 강독 혹은 제술로 시험하여 우등한 자(경상·전라·충청도는 5명, 나머지 도는 3명)를 왕에게 보고하여 생원시 혹은 진사시의 복시에 바로 응시하게 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의 도회가 고려와 달라진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고려의 도회가 시(詩)·부(賦)의 학습과 평가를 위한 행사였던 데 반해, 조선의 도회는 경전 강독 위주로 도회를 진행하려 하였으나 유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경전 강독과 시문의 제술을 섞어 학습시키고 평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둘째, 고려의 도회가 제술업과 연결되어 있었던 데 반해, 조선의 도회는 소과인 생원·진사시와 연결되어 있었다.

세종 때 학교의 정원 대비 도회 수용 인원의 백분율을 계산해 보면, 사학은 20%, 향교는 4.5%로 나온다. 도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학교에서 우수한 성취를 보인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도회는 우수 학생을 위한 상급 교육 프로그램으로써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유생들은 30일씩 3년을 도회에 참가해야 소과(小科)의 2차 시험 격인 복시(覆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의 혜택을 받거나 평가 결과의 반영이라는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도회는 별도의 건물 없이 도회가 열린 고을의 객사(客舍)에 개설하는 것이 관례였고[『현종실록』 5년 윤6월 23일], 가르친 사람은 그 고을의 교수 또는 제독관(提督官)이었다.

변천

도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단되었다가 1639년(인조 17) 「도회시강절목(都會試講節目)」으로 부활이 결정되었다. 부활된 도회는 공도회로 불렸는데, 그것은 조선전기 도회를 기본으로 하되 집중 수학 과정은 생략되고 선발 과정만 남긴 것이었다. 그리고 강독하고 시험하는 책을 『소학』으로 고정시키고, 3~4곳의 도회소에서 초선(初選)한 후 감영에서 도시(都試)하는 2단계 선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 선발 인원을 갑절로 늘림으로써 이전의 도회와 성격이 달라졌다. 그러나 1641년(인조 19) 흉년이 든 와중에 열린 공도회 때 제술 과제의 제목을 둘러싸고 유생들 간에 벌어진 패싸움으로 공도회가 파장되었고, 이를 계기로 공도회가 중단되었다[『인조실록』 19년 6월 6일]. 이 공도회는 1650년(효종 1)에 재개되었는데, 이때는 『소학』 교육을 중시하느라 과거 시험과 거리가 있는 이 정책에 대한 호응이 낮은 것을 고려하여 제술 과정을 추가하였다. 소과 복시 직부라는 특전에도 『소학』 고강이 인기가 없었던 것은 그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노력에 비하여 이후 과거 시험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적다는 데에 있었다.

사학(四學)의 공도회는 1654년(효종 5) 「사학응행절목(四學應行節目)」이 마련되면서 윤차(輪次)와 통합되어 실시되었다. 이후 1659년의 「사학지규(四學之規)」를 거쳐 1663년(현종 3)에는 성균관의 건의에 의해 『속대전』에 규정된 사학합제(四學合製)의 방식이 확정되었다. 1663년에는 고강 16명, 제술 8명씩 선발하던 것을 거꾸로 고강 8명, 제술 16명씩 선발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지방 공도회에 대해서는 기존의 『소학』 일변도의 고강에서 벗어나 사서(四書) 고강을 포함시켰다. 공도회의 운영 방식을 과거 준비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정한 것이다.

이러한 운영상의 변화와 함께 공도회의 성격도 변하였다. 인조대에 부활된 이후 1650년 다시 시행될 때까지 공도회는 부정기적인 장학책으로 인식되었고, 사실상 학교 교육과 연계되지 못한 채 일회적인 시험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1656년(효종 7) 경주교수 허필의 상소를 계기로 공도회 폐지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났지만, 각 도 감사들의 반대에 부딪쳐 공도회는 존속되었다. 이어 현종대에 공도회는 사실상 소과 초시로 정착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최광만, 『조선시대 교육사 탐구』,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최광만, 「17세기 공도회의 운영과 성격」, 『한국교육사학』30권 2호, 2008.
  • 최광만, 「17세기 지방교육 정책의 성격-『과시등록(課試謄錄)』을 중심으로」, 『교육사학연구』18권 2호, 2008.
  • 최광만, 「조선 전기 도회의 성격」, 『교육사학연구』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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