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당(淸黨)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청당 |
한글표제 | 청당 |
한자표제 | 淸黨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집단·기구 |
집필자 | 최성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청당(淸黨)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48년 3월 7일, 『영조실록』 48년 7월 23일 |
영조대 후반 공홍(攻洪)을 주도하다가 영조에게 청류(淸流)·명류(名流)라는 지목을 받아 처벌된 정치 세력.
개설
1772년(영조 48) 노론 일색으로 대사성(大司成) 후보가 의망(擬望)되자, 영조는 이를 탕평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대사성김종수를 해임하고 영의정김치인까지 삭출(削黜)하였다. 더 나아가 영조는 김치인·김종수 등과 관련된 인사들까지 청당(淸黨), 명당(名黨)이라 규정한 후 대거 처벌하였다. 통상 청명당(淸名黨) 사건으로 지칭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의 정치사에서 권세가에 맞서 청의(淸議)를 표방하는 세력은 통상 있었고, 이들이 청론 추구 과정에서 여타의 구체 사안 때문에 처벌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청류 자체가 청당 결성의 죄목으로 대거 처벌된 것은 영조대 후반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한다. 엄밀히 말하여 청당은 영조에게 청당으로 지목되어 처벌된, 공홍계(攻洪系) 청류 세력을 가리킨다.
영조는 임오화변 이후 홍봉한·홍인한 등 노론 북당과 정후겸 등 소론 척신을 위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이들에 맞섰던 노론 남당(南黨)은 김구주와 김종수 등을 중심으로 청류를 자임하며, 홍봉한을 반대하는 공홍(攻洪), 곧 살홍(殺洪) 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 와중에 1772년(영조 48) 3월 조정(趙晸)·김종수(金鍾秀)·서명천(徐命天) 등 노론 3명을 모두 대사성에 의망한 일이 있었다(『영조실록』 48년 3월 7일). 이 무렵 대사성은 이조 참의가 되기 위한 관문이었으므로, 그 후보자들을 모두 노론으로 의망한 것을 영조는 탕평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다. 영조는 대사성에 제수된 김종수를 해임한 후, 책임을 물어 영의정김치인까지 삭출시켰다. 이에 대해 언관을 중심으로 김치인을 옹호하는 등 저항이 일자, 영조는 이들을 김치인·김종수의 세력에 붙어 명예나 얻으려는 청당·명당이라는 죄목으로 총 70여 명 이상의 인사들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거나 유배 보내는 과도한 처분을 내렸다(『영조실록』 48년 7월 23일). 영조의 이러한 처분 내용을 정리한 것이 『영수백세록(永垂百世錄)』이다.
처벌 대상은 김치인·김종수 등 노론 남당 인사들이 핵심이지만, 이 외에도 중립파 노론 인사들은 물론이고 소론계와 소북, 남인계 인사들까지 광범하게 포함되어 있었다[『영조실록』 48년 3월 24일]. 이들은 당파를 불문하고 홍인한과 정후겸 세력에 대항했던 인사들이었다.
조직 및 역할
청당은 공홍·살홍을 주장하고 탕평당을 비판했던 노론 남당을 핵심으로 하여 여타 당파의 청류 표방 세력도 포함된 데다가, 영조가 처벌을 위해 편의로 붙인 명칭이므로 단일한 정파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청당은 영조대 후반 공홍 노선을 견지했던 세력들의 면면을 보여 주는 범주로써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변천
영조의 강력한 처벌로 인해 공홍 노선의 청당 세력은 한때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해에 대부분 사면되었다. 이들은 과도한 처벌을 받은 것으로 인해 도리어 청류(淸流)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홍인한·정후겸 등은 영조를 격발시켜 청류를 탄압한 배후로 지목되면서 명분을 잃었다. 청류들은 정조의 우현좌척(右賢左戚), 곧 사림을 등용하고 척속(戚屬)을 배제한다는 노선에 부합하여 정조 전반에는 주도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영수백세록(永垂百世錄)』
- 『한중록(閑中錄)』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 19세기』, 신구문화사, 2009.
-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