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지법(穿壙之法)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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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천광지법 |
한글표제 | 천광지법 |
한자표제 | 穿壙之法 |
동의어 | 굴혈지법(掘穴之法) |
관련어 | 광중(壙中) |
분야 | 생활·풍속/풍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혜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천광지법(穿壙之法)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년 3월 9일 |
무덤을 하관하기 위해 광중(壙中)을 파는 법.
개설
음택 풍수지리에서는 산수의 외양과 좌향이 길지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판단하면 이어서 무덤을 조성하는데, 그 첫 작업이 무덤의 광중을 파는 것이다. 광중을 파는 천광(穿壙)은 종묘의 조상신과 무덤 자리의 토지 신께 고하는 의례를 거친 뒤 길한 날과 시(時)를 골라서 거행된다.
내용 및 특징
천광하는 법은 1419년(세종 1)의 정이오(鄭以吾) 등이 『장일통요(葬日通要)』를 편집하여 전문과 함께 올린 글에 그 대강이 인용되어 있다. 즉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도 전기해서 장사할 만한 땅을 택하여 날을 가려 천광하고 토지의 신에게 제사한다는 것이다(『세종실록』 1년 3월 9일).
천광하는 법은 간단하지 않다. 먼저 왕이 죽으면 일정 기간 동안 기다렸다가 매장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예기(禮記)』에는 중국에서 천자(天子)는 사후 7개월을 기다렸다가 매장하고 제후는 5개월을, 대부(大夫)와 사(士)는 각각 3개월과 한 달을 기다렸다가 매장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천광을 하는 장소는 풍수지리 이론에 비추어 산수의 형세와 좌향을 꼼꼼히 따지고, 광중을 분금에 맞춰 정한 뒤, 앞뒤로 지표면 위에 표식을 해두어 무덤을 팔 때 좌향(坐向)이 조금이라도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장서(葬書)』에서는 좌향에서 약간의 차이라도 나면 길흉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하였다. 표식대로 광중을 파 내려가는데, 이때 파낸 흙은 나중에 봉분을 만들 때 써야 하기 때문에 한쪽에 조심스럽게 모아 둔다.
광중의 깊이는 내맥의 형상에 따라 달라지는데 풍만하고 두텁게 내려 온 맥이라면 깊게 쓰고, 얕고 가늘게 내려 온 맥이라면 보다 얕게 묻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기에는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광중을 다 팠으면 시신이 놓이는 광중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일정한 높이까지 석회를 흙과 함께 섞어 일종의 곽을 만든다. 석회를 사용하는 이유는 물이나 곤충, 바람, 나무뿌리의 침습을 막아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석회를 사용해서 광중을 판 다음에는 염습을 치밀하게 한 시신을 누이고, 홍대를 친 후, 광중을 마무리하고, 흙을 조심스럽게 덮는다. 봉분을 조성한 뒤 봉분 뒤 좌우로 활개를 만들고, 봉분 주위에 둘레석을 쌓고 봉분 앞에 혼유석을 마련해 놓는다. 왕릉의 경우, 대개 정자각을 조성하고, 앞쪽으로 신도(神道)와 인도(人道)로 구분된 길을 사이에 두고 홍살문도 조성하며, 묘지석도 세운다.
변천
조선시대 내내 천광은 혈의 길지 여부, 길일, 길한 좌향, 토지신에의 제사 의례를 거쳐 실행되었다. 광중을 파는 법의 역사는 유구한데, 예를 들면 과거 고구려 영토였던 유주자사진의 무덤에 적힌 묘지문에 길일과 제사의례를 통해 자손이 영달할 것을 바라는 기록이 있다. 또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간지도는 무령왕의 시신이 놓인 곳을 제외하고 나반의 좌향이 그대로 표기되어 있으며, 고구려 영토에 있었던 중국 관원의 무덤에서는 1세기경에 만들어진 칠기 나반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천광에는 석회를 사용하고, 일정 기간 비워 둔 뒤 길일을 택하고, 형세와 방위를 고려하고, 토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전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참고문헌
- 『서경잡기(西京雜記)』
- 『예기(禮記)』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권오영, 『고대동아시아 문명교류사의 빛-무령왕릉』, 돌베개, 2005.
- 김혜정, 『중국 고전의 풍수지리 사상』, (주)한국학술정보, 2008.
- 장성규·김혜정, 『완역 풍수경전』, 문예원, 2010.
-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3.
- 김혜정, 「양택 풍수지리의 방위관-『택경(宅經』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제18권 제2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