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검(槍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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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창검 |
한글표제 | 창검 |
한자표제 | 槍劍 |
상위어 | 무구(舞具), 의물(儀物) |
동의어 | 검(劒), 창(槍), 창칼 |
관련어 | 간척(干尺), 궁시(弓矢), 둑제(纛祭), 무무(武舞),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회례연(會禮宴) |
분야 | 문화/예술/정재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종숙 |
재질 | 나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창검(槍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4년 3월 28일, 『세종실록』 22년 6월 13일, 『태조실록』 2년 7월 26일 |
① 조선시대에 제향이나 회례연(會禮宴)에서 무력의 위엄을 나타내는 무무(武舞)를 출 때 사용한 춤 도구.
② 무기인 창과 검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창검(槍劍)은 원래 공격용 무기이지만, 춤에서는 전쟁의 승리와 무력의 위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종묘 제향 및 회례연의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에서는 조선 창업에 의미를 두어,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태종(太宗) 등의 무위(武威)와 공업(功業)을 창과 검, 활과 화살로 표현하였다. 또 둑제(纛祭) 때는 주로 태조 이성계의 무공을 찬양하는 악장을 중심으로, 간척(干戚)과 궁시(弓矢), 창검을 춤에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종묘 제향과 회례연 때 연행하는 무무인 정대업지무는 1447년(세종 29) 6월 4일에 처음 시행되었는데, 36명의 일무대(佾舞隊) 가운데 12명은 검을, 다른 12명은 창을, 나머지 12명은 궁시를 잡고 춤추도록 하였다. 이 춤의 전거는 당나라 태종의 무공을 찬양한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에 두었다(『세종실록』 14년 3월 28일). 일명 칠덕무(七德舞)라고도 불리는 진왕파진악을 모방하여, 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조종(祖宗)의 업적을 창검과 궁시 등의 무기를 사용하는 정대업지무로 나타낸 것이다.
조선시대의 군사 제사인 둑제에서는 「납씨가(納氏歌)」와 「정동방곡(靖東方曲)」에 붙인 곡을 반주로 의식을 진행하였는데,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終獻) 때 창검을 잡고 춤을 추었다. 제기를 거두는 철변두(徹籩豆) 때에는 간척과 궁시, 창검을 든 사람들이 모두 함께 세 번 회선하며 춤을 추었다(『세종실록』 22년 6월 13일). 「납씨가」와 「정동방곡」은 정도전(鄭道傳)이 이성계의 무공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서 바친 악장이다(『태조실록』 2년 7월 26일).
형태
정대업지무와 둑제에 사용하는 창검은 모두 나무로 만들었는데, 각각의 용도에 따라 모양과 색, 크기가 조금씩 달랐다.
회례연 때 공연된 정대업지무의 창은 자루는 붉은색을 칠하고, 자루 하단은 사슴뿔로 장식하였다. 창날에는 은박을 붙이고, 날과 자루가 만나는 지점에는 작은 둑[纛] 모양의 홍색 상모(象毛)를 드리웠다. 그에 비해 종묘 제향 때 연행된 정대업지무의 창에는 은박을 붙이지 않고 분칠(粉柒)을 하였으며, 자루 끝은 쇠로 장식하였다. 둑제 때 사용하는 창은 이년목(二年木)으로 만들었는데, 자루는 붉게 칠하고 창날에는 분을 칠하였다.
회례연 정대업지무의 검은 칼날에는 은박을 붙이고, 칼자루는 어피(魚皮)로 감쌌다. 칼날과 칼자루의 경계인 양마(陽亇)와 칼자루 끝의 운두(雲頭)에는 금박을 입혔으며, 끈[纓子]은 홍색 줄[紅絛兒]과 녹색 술[綠垂兒]을 달았다. 종묘제례 때 사용하는 검에는 금박·은박·어피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색칠도 하지 않았다. 둑제에 쓰이는 검은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刀)의 일종으로, 나무로 만들어 청색 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악학궤범(樂學軌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