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토선(地土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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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의 토착민이 소유한 배.

개설

조선시대 중앙에 상납되는 전세는 경기와 강원도의 몇 개 고을에서 서울에 있는 경창(京倉)에 직접 가져다 바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할 조창(漕倉)에 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각 조창에는 중앙에 세곡을 상납하는 조운선(漕運船)이 배치되었으며, 각 고을에서 조군(漕軍)으로 차정된 이들에 의해 세곡이 운송되었다. 다만 조창까지의 거리가 멀어 조창, 수참에 속하지 않은 고을의 경우 민간에서 배를 임대하여 세곡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때 민간에서 빌리는 배는 지토선(地土船)을 우선으로 하고, 지토선이 없는 고을에서는 경강선(京江船)을 이용하도록 법제화하였다. 1698년(숙종 24) 『수교집록(受敎輯錄)』에 따르면, 각 고을의 전세는 경강선에 실을 수 없으며, 반드시 본 고을의 지토선이나 인근 고을의 지토선을 빌려 싣도록 하고, 만일 각 고을에서 지토선을 빌리지 못하면 서울에서 활동하는 경강선을 이용할 수 있으나, 이때에는 선주(船主), 사공(沙工), 격군(格軍)의 신원이 명확한지를 살피고 건실한 선박을 골라 싣도록 하였다.

임운하는 데 있어 경강선보다 지토선을 우선시한 이유는 일부러 침몰 사고를 일으켜 세곡의 손실을 야기하는 고패(故敗)를 염려한 것이었다. 지토선의 경우 고을에 등록되어 있고, 선주(船主)와 그 가족이 고을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배를 관리, 감독하는 것이 수월하였다. 더욱이 지토선은 인근 고을뿐 아니라 원거리 항해에 있어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에 17세기 초부터 지토선은 세곡을 임운하는 데 있어 우선권을 부여받았다.

연원 및 변천

17세기에 운영되던 조창을 살펴보면, 충청도의 공진창, 전라도의 성당창, 군산창, 법성창, 그리고 수참(水站)으로서 충주의 가흥창이 운영되고 있을 뿐이었다. 각 조창에 속하여 전세곡과 대동미를 상납하는 읍은 모두 48읍에 그쳤다. 선운하는 고을이 184개 읍에 달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136읍이 사선 임대를 통해 세곡을 운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말부터 사선임운을 경강선이 장악해가면서 지토선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영조대 초반 경강선의 대규모 침몰 사고로 인해 다시금 그 역할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세곡 운송에 참여하는 지토선인들은 기일 안에 무사히 세곡을 경창에 상납하면 1척 당 50석의 운송 대가를 받거나 거리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뱃삯을 받았다. 뱃삯의 경우, 충청도에서는 10석당 1석을, 전라도와 경상도는 10석당 2~3석을 받았기 때문에 선인들은 가능한 세곡을 많이 실어 많은 뱃삯을 받고자 하였다. 이처럼 지토선이 세곡 운송에 대거 참여하게 된 것은 모든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한 대동법(大同法)이 큰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전세곡의 2~3배에 달하는 대동미가 추가로 중앙에 상납되어 세곡의 운송과 보관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16세기 이후 관선 조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상황에서 대동미의 운송을 고민하던 중앙 정부는 지방에 산재한 지토선과 경강선을 활용하여 대동미의 수송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토선은 선박의 규모가 관선이나 경강선에 비해 작은데다가 궁방이나 아문에서 지토선을 점탈하는 사례가 많아 세곡 운송에 동원되는 지토선의 수가 줄어드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더욱이 18세기 초 한강에는 최소 200~300석에서 최대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배[京江船]가 300여 척이나 운영되고 있을 만큼 경강선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18세기 중엽 경강선의 침몰 사고로 지토선이 세곡 운송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지만, 정조대 주교사(舟橋司)의 설치로 사선임운의 권한이 경강상인에게 넘어감으로써 지토선은 경강선인들과의 경쟁에서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수교집록(受敎輯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고동환, 「조선후기 연안항해와 외양항로의 개척」, 『동방학지』16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3.
  • 최완기, 「朝鮮後期 地土船의 稅穀賃運」, 『한국사연구』57, 한국사연구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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