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포(地雷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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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인명을 살상하거나 적의 부대를 파괴할 목적으로 땅속에 묻어 두는 폭약.

개설

지뢰포는 1598년(선조 31) 중국 장군 반사견(潘思見)의 수본(手本)에 의해서 조선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화약 원료 수급의 어려움 등이 있었으나 1627년(인조 5)부터 비로소 조선에서 제작·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연원 및 변천

1598년(선조 31) 중국금의위(錦衣衛) 철전장군(鐵殿將軍)의 직책을 맡고 있는 반사견이 왜노를 치는 조선의 장수들을 위해 수본(手本: 한자 중복 삭제)을 작성하였는데 물속에 잠수하여 적선을 파괴하는 법, 병기 만드는 법, 독약 사용법 등 왜적을 물리칠 수 있는 10여 가지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중의 하나로 “지뢰포를 만들어 겉에서 보기에 무덤 모양같이 설치해서 1백 보 밖에서 적을 살상하는 법”이라고 하여 지뢰포를 조선에 처음 소개하였다(『선조실록』 31년 6월 19일).

이후 1601년 훈련도감에서 중국의 화약 제조기술자 손용(孫龍)으로부터 전습을 받았는데 “제약(劑藥)하는 사람 손용(孫龍)을 전라감사 및 통제사의 진영에 보내어 화약과 포를 만드는 방법을 전습하게 하였는데, 독약법(毒藥法)·분화법(噴火法) 등은 모두 전습하였으나, 지뢰포는 화약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전습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해상의 염초(焰硝) 역시 곧 부안 땅에서 구우려고 도감을 통하여 재촉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왔다고 합니다. 지뢰는 육전(陸戰)에 제일 중요한 것이고 해초(海焇) 역시 이로움이 많은 것인데,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들 수가 없으므로 그에게 다시 그 제조법을 시험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여 원료의 수급에 따른 어려움 때문에 기술 전습의->이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선조실록』 34년 5월 21일).

하지만 지뢰포의 위력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조대에 와서는 비변사에서 “신들이 홍제원(弘濟院)에 가서 지뢰포를 시험 삼아 쏘아 보건대, 규격과 제작이 매우 좋아 땅속에 묻은 화승(火繩)이 연속해서 타다가 터졌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용한다면 반드시 큰 도움이 있을 것이니, 서로(西路)의 전수하는 곳으로 하여금 시급히 만들게 하여 위급할 때 쓰도록 하소서.”라고 요청하였다(『인조실록』 3년 3월 7일). 이후 조선에서 지뢰포가 제작·보급되어 훈련에서 사용된 것은 1627년(인조 5)으로 보인다[『인조실록』 인조 5년 6월 10일 2번째기사].

형태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지뢰가 사용된 것은 명나라 건문제(建文帝)의 군대와 연왕(燕王)의 군대가 싸웠던 1440년 백구하(白溝河) 전쟁이 최초였다. 이 전쟁의 첫째 날에 건문제의 군대는 지면에 설치해 놓은 폭발성의 화기를 사용하여 연왕의 군대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뢰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형태와 위력을 가진 지뢰포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참고문헌

  • 시노다 고이치 저, 신동기 역, 『무기와 방어구(중국편)』, 들녘,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