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비(中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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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특지나 비망기로 관직을 제수하던 인사 관행.

개설

중비는 이조(吏曹)나 병조(兵曹)를 통한 일상적인 인사 관행과는 달리 특별히 관직을 제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유사한 용어로는 특제(特除) 또는 특탁(特擢)·특선(特宣)·총탁(寵擢) 등이 있었다. 본래 중비라는 용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황제의 조령(詔令)으로, 황제나 왕의 명령을 지칭하였다. ‘중(中)’이라는 표현은 궁궐 내부에서 나온 명령을 의미하며, ‘비(批)’는 사람을 분차(分次)한다는 의미로 인사 대상자의 차례를 정한다는 의미였다. 중비는 조선초기부터 시행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특히 조선후기 숙종대 이후에는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대상 관직은 광범위한데, 대체로는 6품 이상의 관직에 집중되고, 경관직이나 중앙 관서에 역시 집중되었다. 중비 제수는 다양한 정치적 의도와 정책적 고려 등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중비를 통한 인사 관행은 몇 가지 유형이 있었다. 먼저 이비(吏批)나 병비(兵批)와 같은 이조와 병조의 정사(政事)가 있는 자리에서 왕이 전지나 비망기의 형태로 관직을 제수한 경우였다. 두 번째로 이조나 병조의 정사와는 상관없이 왕이 비망기나 전지를 내려 관직을 제수하는 경우였다. 이 밖에 왕이 경연석상에서 즉석으로 관직을 제수하는 경우도 중비로 표현되었다(『영조실록』 25년 8월 10일).

중비로 제수되는 관직은 특별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최상위 관직인 정1품 영의정부터 최하위 관직인 능(陵) 참봉(參奉)까지 실로 다양한 관직에 대해서 시행되었다. 다만 영조대의 실제 사례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7품 이하 관직의 사례는 많지 않고 대개는 6품 이상 관직에 한정되었다.

중비로 제수된 6품직에는 경관직으로 부수찬과 겸사서, 외관직으로 현감과 찰방이 있었다. 그러나 중비 제수의 상당수는 경관직에 집중되었다. 관서로 보면 삼사(三司)나 육조(六曹), 그리고 승정원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관직으로 보면 승지나 이조 판서에 특히 집중되었다. 이는 승지나 이조 판서가 갖는 정치적 역할 때문이었다. 육승지 전체를 중비로 교체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왕에 의한 중비 제수는 상당히 정치적 의미가 강하였다. 일단 정치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하는 시기에 중비 제수가 집중되었다. 예를 들어 영조대의 경우 1727년(영조 3) 이른바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 과정에서 중비 제수가 집중되었다. 또한 1762년(영조 38)의 사도세자 참변 다음 해인 1763년에 정국의 쇄신을 위해 역시 중비 제수가 많이 시행되었다.

또한 중비로 관직을 제수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중비 제수의 의도를 짐작하게 하였다. 영조대의 경우 정치적 공로가 있거나 왕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인물에 집중되며, 이들 외에도 외척 내지 외척 계열에 속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이는 왕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의 지지 세력을 육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중비가 이용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정치 세력의 등용도 중비를 통해서 하고 있어 주목되었다. 예를 들어 영조대의 경우 그동안 정치에서 소수 세력이었던 남인의 진출을 위하여 상징적으로 그 당시 남인에서 지도급 위치에 있던 오광운이나 채제공, 이언적의 후손인 이헌목과 권상일 등을 중비로 제수하였다. 중비는 또한 은사(恩賜)의 성격이 강하였다. 과거 급제 뒤 관직에 나오지 못하고 연로하다는 이유로, 혹은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군인 가운데 조선에 남은 황조인(皇朝人)이라고 하여 중비를 제수하였고, 4대 가족이 동거한다는 이유로 중비를 통하여 관직을 제수하였다.

변천

중비를 통한 인사 관행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비단 조선만의 관행은 아니었다.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관행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를 나타내는 명칭도 다양하였다. 중비를 비롯하여 ‘사봉묵칙(斜封墨勅)’ 혹은 ‘내비(內批)’로 표현되거나 ‘특지수(特旨授)’ 등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 대상 관직도 재상에서부터 내외 원외랑(員外郞), 좌·우대어사 등으로 광범위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중비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62년(명종 17) 5월 강사필(姜士弼)을 장령(掌令)으로 제수한 기록에서부터였다(『명종실록』17년 5월 16일). 그러나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이 중비를 통한 인사 관행의 첫 등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중비가 특제 혹은 특탁과 유사한 관행이므로 그 시작은 이미 조선초까지로 소급된다.

이미 조선초부터 관직 제수 관행으로 중비와 같은 형태의 특제를 통한 인사가 이루어졌다. 실제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가자(加資) 등은 특제로 행하는 것이 제도화되기도 하였다. 중비 제수의 인사 관행은 특히 조선후기에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숙종대 이후 그 횟수가 더욱 빈번해지며 고종대에까지 이어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차장섭, 『조선 후기 벌열 연구』, 일조각, 1997.
  • 艾永明, 『淸朝文官制度』, 商務印書館, 2003.
  • 이근호, 「영조대 중비 제수의 내용과 성격」, 『진단학보』 10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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