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곽(早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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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조곽 |
한글표제 | 조곽 |
한자표제 | 早藿 |
대역어 | 미역 |
동의어 | 감곽(甘藿), 곽(籗), 곽이(藿耳), 분곽(粉藿), 사곽(絲藿), 해곽(海藿), 해채(海菜) |
관련어 | 장곽(長藿)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식재료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차경희 |
수확시기 | 2월~6월 |
관련 의례 | 천신제(薦新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조곽(早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33년 7월 16일 |
천신제(薦新祭)를 지낼 때 올리던 제물의 하나로, 음식 재료로 사용한 갈조식물 미역과의 해조(海藻).
개설
미역은 다시마목 미역과의 갈조식물이다. 난류성 해조류로 바닷속 암초에 붙어살며, 색은 암갈색을 띤다. 조선에서 1월에 천신하는 제물이었다. 조곽(早藿)은 일찍 생산되는 미역을 말한다. 해채(海菜), 해곽(海藿), 분곽(粉藿), 곽이(藿耳), 사곽(絲藿), 감곽(甘藿)이라고도 한다.
원산지 및 유통
『세종실록』 「지리지」에 경상도경주부(慶州府) 동래현(東萊縣)과 안동도호부(安東大都護府) 영덕현(盈德縣) 그리고 전라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8가지의 해조를 구분하고, 그중 조곽은 이른 미역으로 삼척에서 정월에 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해조류를 먹은 역사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 이전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해조와 곤포(昆布) 등을 즐겨 먹는데, 짜고 비린내가 나지만 여러 번 먹으면 먹을 만하다고 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선왕 때 원나라로 미역을 보낸 기록과 문종이 바닷가의 미역을 따는 곽전(藿田)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원 및 용도
1월에 진상된 조곽은 종묘에 천신하였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장례 때 혼궁(魂宮) 진배 물품에 품질이 좋은 미역인 분곽과 일찍 따서 말린 미역인 조곽 등이 올랐다. 영조대에 혼전(魂殿)에 공진하는 채소와 과일의 공물 폐단을 논하던 중 해곽은 종류는 1가지이나 명칭이 분곽, 조곽, 곽이, 사곽, 감곽으로 5가지나 되어 그것을 품종대로 각각 올리니 민폐가 매우 크다고 하면서 사곽과 곽이 2종류는 특별히 감하게 한 일이 있었다(『영조실록』 33년 7월 16일).
각 도에서 진상을 하는 물종의 비리도 많았다. 인조대에 강원감사는 천신 물품으로 조곽을 올리지 않은 삼척부사를 파면했고, 전라도의 진상 가운데 대왕대비전과 중궁전에 올릴 각각의 조곽 10근과 8근 등을 훔친 배지인을 엄중히 치죄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 『음식방문(飮食方文)』에는 푸르고 좋은 미역을 불려 다듬어 마디마디 싸 동심결을 맺어 지지는 미역자반이 기록되어 있다. 보양의 목적으로도 이용되는데, 『보감록(寶鑑錄)』에는 미역으로 늙은 어버이를 보양할 수 있다고 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기(氣)를 내리므로 지속적으로 먹으면 몸이 여위니 장복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또 고려의 미역[昆布]은 쌀뜨물에 담가 짠맛을 빼고 국을 끓여 조밥이나 멥쌀밥과 함께 먹으면 아주 좋다. 몸의 기를 내리는 역할을 하는데, 어떤 식품과 같이 먹어도 좋다고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는 삼신할미가 점지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출산을 앞두고는 삼신상을 차려 건강한 아이의 순산을 빌었다. 임산부는 해산하기 전부터 꺾이지 않은 장곽(長藿)이라는 긴 미역을 준비해 둔다. 분만이 가까워 오면 장곽과 흰쌀로 삼신상을 차리고, 순산 후에는 흰쌀로 밥을 짓고, 미역국을 끓여 3그릇씩을 떠 놓아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미역국은 산모들이 해산날부터 삼칠일까지 끓여 먹는데, 미역이 산모들의 산후회복과 수유를 돕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고려도경(高麗圖經)』
- 『규합총서(閨閤叢書)』
- 『도문대작(屠門大嚼)』
- 『보감록(寶鑑錄)』
- 『본초강목(本草綱目)』
- 『윤씨음식법(尹氏飮食法)』
- 『음식방문(飮食方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