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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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무(武舞)에 편성된, 장대에 털 뭉치를 연결한 의물(儀物).

개설

무무는 종묘 제례와 문묘 제례 등의 의례에서 공연되는 일무(佾舞), 즉 여러 사람이 줄지어 서서 추는 춤을 말한다. 무공(武功)을 상징하는 춤으로, 문덕(文德)을 상징하는 문무(文舞)와 짝을 이루어 연행된다. 종묘와 문묘의 제례에서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거행할 때 공연되는데, 정은 이때 춤 대열 앞쪽에 짝을 이루어 진열되어 무무를 인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예종대에 둑(纛)과 함께 중국 송나라에서 도입되어, 인문무(引文舞)와 인무무(引武舞)에 각각 1개씩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30년(세종 12)에 정과 둑을 2개씩 만들어, 둑 2개는 문무에, 정 2개는 무무에 사용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공인(工人) 2명이 정 1개씩을 들고 무무 대열의 앞쪽 좌우에 배치되어 대열을 인도하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관복도설(冠服圖說)」에 따르면, 정을 드는 공인은 머리에 피변(皮弁)을 쓰고 비란삼(緋鸞衫)과 백주고(白紬袴)를 착용하였으며, 백주말대(白紬抹帶)와 금동록혁대(金銅綠革帶)를 허리에 찼다.

『세종실록』 「오례」의 「악기도설(樂器圖說)」에서는 송나라 때 편찬된 『악서(樂書)』를 인용하여 정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하였다.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의 「악기도설」에도 거의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보충·해설하면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에 송(宋)나라 사람이 상림(桑林)의 춤을 만들어 진(晉)나라 왕을 접대하였다. 그런데 무사(舞師)가 정하(旌夏)를 깃발에 사용하니 진나라 왕이 두려워하면서 물러나 방에 들어가므로, 정을 버리고 접대를 마쳤다. 대개 정하는 큰 깃발[旌]을 가리키는데, 춤추는 사람이 그 행렬에 정을 들어 알린 것이다. 『의례(儀禮)』「대사례(大射禮)」에서, ‘정을 들 때는 궁성(宮聲)으로써 알리고, 정을 가로 놓을 때는 상성(商聲)으로써 알린다.’고 한 것이 또한 이런 류(類)이다. 그러나 무악(武樂)은 성공을 상징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정으로써 이에 참여하게 한다. 당나라 이후의 왕조인 송나라의 『태악소용(太樂所用)』이란 책의 주(注)에는, ‘털 뭉치인 모(旄) 세 개가 겹쳐 있는 것은 고둑(高纛)이라는 깃발의 형태와 같으며, 두 공인이 좌우로 나뉘어 서서 무무를 인도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또한 옛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정은 무무 대열의 표식(表識)과 성공의 상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형태

왕의 의장 행렬인 노부(鹵簿)에 편성된 정당(旌幢)과 전체적으로 유사하지만, 시기별에 따라 형태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세종실록』「오례」에 수록된 정은 9개의 털 뭉치가 수직으로 연결된 형태이고, 장대도 용머리 모양이 아니다. 털 뭉치와 장대 사이에는 큰 매듭이 있다. 그에 비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록된 정은 장대가 용머리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털 뭉치 3개가 수직으로 연결되어 있다. 『악학궤범』에 소개되어 있는 정은 『국조오례의』의 것과 형태가 비슷한데, 장대의 길이는 8척(尺) 6촌(寸), 장대의 지름은 1촌이다.

1759년(영조 35)에 편찬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의 「품목질(稟目秩)」에는 당시에 정 1개를 보수하는 데 사용된 재료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길이 7척 너비 2촌 5분(分)인 백화방주(白花方紬) 5편(片), 길이 7촌 너비 2촌 5분인 모단(冒緞) 5편, 꿰는 노끈용 홍향사(紅鄕絲) 4전(錢), 가는 구리철사 8척, 길이 7촌 너비 2촌 5분인 홍노주주(紅潞洲紬) 5조각이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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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악학궤범(樂學軌範)』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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