둑(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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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의 행렬이나 군대의 출정 시에 앞세우던 것으로 군왕 및 지휘관의 군령권을 상징하던 의장물.

개설

둑은 옛날 중국 전설상의 군왕인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의 탁록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그 머리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한다. 치우는 중국 고대인들에게 엄청난 괴력을 소유한 전쟁의 신으로 받아들여졌는데, 특히 장기간에 걸쳐 전란이 계속되었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러한 치우의 이미지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치우는 황제에 반하는 악의 화신으로서의 성격과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둑은 이러한 이미지를 차용하여 만들어진 군의 의장물이었다. 그 모양은 창에 꿰어진 치우의 머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아주 이른 시기부터 둑은 군 지휘자의 군권을 상징하는 의장물로 채택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충렬왕대 기록에 이미 둑의 존재가 보이고, 조선 건국 직후에도 강무당(講武堂)에 둑기를 설치하였던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정기적으로 둑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이를 둑제라고 하였다. 둑제에는 2개의 큰 둑기와 2개의 작은 둑기가 사용되었다. 한편으로 둑은 왕의 행차 시 노부(鹵簿) 행렬 맨 앞에 늘 고정적으로 배치되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오례」의 노부조에는 대가노부(大駕鹵簿), 법가노부(法駕鹵簿), 소가노부(小駕鹵簿)의 행차 맨 앞에 시위군 병력이 배치되었는데, 시위군의 행렬 가운데에는 둑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노부 조항에는 둑이 빠져 있어, 두 기록이 작성된 시기 사이에 이를 노부 행렬에서 제외한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둑은 노부 행렬에는 포함되었으나, 궁궐에서 진행되는 의식에 배치되는 의장물에는 제외되어 있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왕의 의장물의 성격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대에 편찬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는 노부를 배치할 때 둑이 있었고, 조선후기 왕 행차를 기록한 기록화 등에는 대열 앞에 둑이 보이고 있어, 『국조오례의』 편찬 이후 다시 왕 행차에 둑을 설치하도록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왕 호위에 동원되는 병력에 대한 군령권을 상징하기 위해 둑을 설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으로 둑은 실제 군사행동 직전에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몇 차례의 여진 정벌과 대마도 정벌 등 실제 군사작전이 몇 차례 있었다. 이러한 경우 출병 전 서울에서 둑제를 지내거나, 혹은 군사작전 지역으로 이동하여 전투 전에 둑제를 지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여타의 의장물들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실질적인 기능은 없었던 반면에, 둑은 실질적 기능과 의장으로의 기능을 동시에 겸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변천

둑은 중국 고대 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그 기원이 어느 시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사(高麗史)』에서 둑이 등장하는데, 충렬왕 시기 일본 출정 과정에서 둑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판단하건대, 둑은 고려시대부터 군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건국 직후부터 그 존재가 드러나며, 특히 『태조실록』 등에서는 둑기가 스스로 움직였다던지, 둑이 소리를 냈다던지 하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군사적인 정변이나 국가의 비상사태를 암시하는 존재로 여겨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

둑의 형태를 자세히 전하고 있는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의 군기 도설, 그리고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참조해 보면 둑기는 치우의 머리를 창으로 꿴 형태로 만들어졌고, 치우의 머리털을 형상화한 것에는 소의 꼬리털을 사용하였다. 행진할 때에는 말을 탄 장교가 잡고 2~4인의 군사들이 받쳐주었는데,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순조순원후가례도감의궤(純祖純元后嘉禮都監儀軌)』의 반차도에는 말 탄 장교 1명이 둑을 잡고 네 명의 군사들이 좌우에서 이를 받치고 있는 그림이 남아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치우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의 민간에서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치우를 형상화한 둑도 군의 의장물로만 사용되었기에 일반 민간의 생활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순조순원후가례도감의궤(純祖純元后嘉禮都監儀軌)』
  • 『통전(通典)』
  • 『문헌통고(文獻通考)』
  •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 이성구, 『중국고대의 주술적 사유와 제왕통치』, 일조각, 1997.
  •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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