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鼎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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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석 |
한글표제 | 정석 |
한자표제 | 鼎席 |
상위어 | 길례(吉禮) |
하위어 | 우정(牛鼎), 시정(豕鼎), 양정(羊鼎) |
동의어 | 삼공(三公) |
관련어 | 구정(九鼎), 우정(禹鼎), 진찬(進饌), 제사(祭祀) |
분야 | 왕실/왕실문화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용도 | 길례 |
재질 | 청동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석(鼎席) |
종묘 제례에서 희생 제물을 삶던 정(鼎)을 설치한 곳이거나, 정의 발이 세 개인 것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삼공(三公)을 의미하기도 함.
개설
정(鼎)은 2개의 손잡이와 3개의 발이 달린 솥의 일종으로서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정의 시원은 구정(九鼎)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정은 중국하나라의 시조인 우임금이 구주(九州)에서 금속을 거두어 주조한 큰 청동 솥 아홉 개였다. 우임금은 이 구정에 희생 제물을 삶아 하늘에 제사지냈다. 즉 우임금은 구정의 희생 제물을 통해 하늘과 소통하며 천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구정은 하나라 때부터 천명을 받은 제왕의 정통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 구정은 하나라가 망한 후 은나라로 전해졌고, 은나라가 망하면서 주나라로 전해졌다.
하・은・주 시대에 구정은 종묘에 있었다. 이는 중국 하・은・주 시대에 천자의 권력과 정통성이 종묘와 구정에 의해 뒷받침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은・주 시대에 천자가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거나 재상을 임명할 때는 종묘에서 했다. 이를 통해 천자의 결정은 조상의 신령과 구정의 뜻 즉 천명의 뜻으로 정당화되었다.
한국사에서 종묘는 삼국시대에 건설되었는데, 당시의 종묘에도 정(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묘 제도는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 크게 발달했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에는 종묘 제사뿐 아니라 정의 종류 및 사용에 관하여도 자세한 규정이 마련되어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시대의 종묘는 천명이 머무는 신성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종묘에는 천명을 받아 조선을 개국한 태조이성계와 그 이성계의 천명을 계승한 역대 왕의 신령들이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종묘에는 다양한 종류의 정(鼎)이 있었는데, 이들 정은 구정과 마찬가지로 희생 제물을 올릴 때 이용하였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제기도설(祭器圖說)’에 의하면 정에는 우정(牛鼎), 양정(羊鼎), 시정(豕鼎)이 있었다. 우정, 양정, 시정은 소, 양, 돼지를 희생 제물로 쓸 때 이용되었다.
종묘의 희생 제물은 난도(鑾刀)라고 하는 특별한 칼을 사용해 잡았다. 난도는 칼날의 끝과 등 쪽에 작은 방울이 달려 소리가 나는 칼로서 태고의 칼을 상징했다. 이렇게 희생된 제물은 주방으로 옮겨져 확(鑊)이라고 하는 가마솥에서 삶아졌다. 종묘 제사 당일 새벽에 왕은 최고의 예복인 면류관과 구장복 차림으로 편전을 나와 종묘로 행차했다. 구체적으로는 편전의 동온돌에서 대문 앞까지는 걸어갔고, 그곳에서 여(輿)라고 하는 가마를 타고 궁궐 정문까지 갔는데, 궁궐 정문에서 다시 연(輦)이라고 하는 가마를 타고 종묘 대문까지 갔다. 종묘 대문에서 다시 여로 갈아타고 재궁 문 밖까지 간 후 그곳에서 내려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이 재궁에서 기다리는 동안, 각종 제물이 제기에 채워졌다. 이렇게 제사 준비가 완료되면 왕은 종묘 정전으로 가서 진향(進香), 진찬(進瓚), 전폐(奠幣)를 순서대로 거행하였다. 진향은 하늘에 있는 혼령을 불러오기 위해 향을 피우는 의례였고, 진찬은 땅속에 있는 혼백을 불러오기 위해 옥잔에 들어있는 술을 땅에 붓는 의례였다. 전폐는 비단을 묶은 폐백을 신령에게 예물로 올리는 의례였다. 진향에서 전폐는 새벽에 거행하였기에 신관례(晨祼禮)라고 하였다.
왕이 신관례를 거행하는 동안 몇 명의 제관이 주방으로 가서 확에 들어있는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를 우정, 양정, 시정에 옮겨 담았다. 이 정들은 종묘 정전 동문 밖에 설치된 찬만(饌幔)으로 옮겨졌다. 왕의 신관례가 끝나면 각각의 정에 들어있던 희생 제물은 조(俎)라고 하는 제기에 각각 담겨져 신령에게 올려졌는데, 이 의례가 진찬(進饌)이었다. 진찬 이후 왕은 초헌관이 되어 신령에게 술 석 잔을 올렸다. 이어서 고위 관료 중 아헌관과 종헌관으로 선발된 사람이 또 신령에게 술 석 잔을 올렸는데, 보통 아헌관은 영의정, 종헌관은 좌의정이 맡았다. 삼헌례가 끝나면 왕은 음복례를 거행하였다. 음복은 신령이 내려주신 복을 마신다는 의미로 제사에 사용한 술과 안주를 먹고 마시는 의례였다. 이때의 안주는 희생 제물로 이용된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였다. 음복 이후 왕이 환궁하면서 종묘 제사는 완료되었다.
형태
『세종실록』에 의하면 우정(牛鼎)은 세 발이 소와 같고, 발마다 위에는 해당 동물의 머리모양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우정의 소 머리는 백금으로 장식하고, 양정과 시정의 머리장식은 구리로 하였다. 우정의 크기는 아가리의 직경과 밑바닥의 직경이 모두 1척 3촌, 깊이가 1척 2촌 2푼, 용량이 1곡(斛)이었다. 양정의 크기는 아가리의 직경과 밑바닥의 직경이 모두 1척, 깊이가 1척 3푼, 용량은 5두(斗)였다. 시정의 크기는 아가리의 직경과 밑바닥의 직경이 9촌, 깊이 7촌 6푼, 용량은 3두였다. 우정, 양정, 시정에는 각각 정경(鼎扃), 정멱(鼎羃), 정필(鼎畢)이 있었다. 정경은 정의 뚜껑을 닫는 빗장 역할을 하는 나무로서 우정은 경의 길이가 3척, 양정은 경의 길이가 2척 5촌, 시정은 경의 길이가 2척인데, 옥으로 양쪽 끝을 장식하여 각기 3촌이었다. 정멱은 정의 뚜껑으로서 띠풀로 만들었다. 정필은 제물을 넣거나 꺼낼 때 쓰는 도구인데, 가시나무로 만들며 끝에 두 미늘을 붙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종묘의례에서 희생 제물을 정에 삶아 주로 사용함에 따라 이는 한양의 음식문화, 특히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를 이용한 음식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 『國朝五禮儀』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