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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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곡물의 부피를 재는 단위 혹은 양기(量器)를 일컬으며, 곡자(斛子) 혹은 휘라고도 함.

개설

도량형은 길이[度]와 용량[量], 무게[衡]에 관한 제도를 말한다. 부피를 재는 단위인 곡(斛)은 물건의 양을 측정하는 양기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중앙과 지방 관아에서 사용하는 자와 양기, 저울은 일반적으로 공조에서 표준 모형을 제작하였다. 이를 각 도(道)에 하나씩 내려보내 관찰사로 하여금 규정에 따라 다른 양기들을 바르게 고쳐서 낙인(烙印)하여 쓰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호조에서 구리로 곡자를 만들어 서울 외 지역의 표준으로 삼게 하였는데, 이를 동곡(銅斛)이라 한다(『영조실록』 29년 2월 21일). 매년 추분에는 중앙의 공조와 지방의 영(營), 진(鎭)에서 말[斗]과 섬[斛]의 양기를 일제히 거두어 규격에 맞도록 수정하고, 낙인하는 절차를 밟게 하였다. 이때 말과 섬의 양기가 규격에 맞지 않거나 낙인의 흔적이 불명확한 경우에는 위령률(違令律)로 죄를 다스렸다. 그러나 각 지방의 도량형기를 일정하게 통일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때마다 문제가 발생하였다.

곡식의 부피를 재는 단위인 곡은 중국의 도량형제에서 따온 것인데, 조선에서는 1곡을 10말이 아닌 15말[小斛], 혹은 20말[大斛]로 계산하여 썼다. 곡은 석(石)과 통용되는 개념으로 대곡은 전석(全石), 소곡은 평석(平石)으로도 쓰인다.

1446년(세종 28) 9월 용량의 제도는 신영조척(新營造尺)에 따라 10작(勺)을 1홉으로, 10홉을 1되로, 10되를 1말로, 15말을 평석(平石, 소곡)으로, 20말을 전석(全石, 대곡)으로 하는 원칙이 정해졌다. 이때 대곡은 길이가 2척(尺), 너비가 1척 1촌(寸) 2분(分), 깊이가 1척 7촌 5분이 되게 하였으며, 소곡은 길이가 2척, 너비가 1척, 깊이가 1척 4촌 7분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조선후기까지 그대로 지켜졌다. 다만, 『속대전』이 간행되면서 양기의 크기가 일부 조정되었다.

변천

1678년(숙종 4) 무렵부터 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지만, 현물화폐인 쌀과 포목 역시 시중에서 자주 거래되었다. 이 때문에 마되[斗升]나 곡자와 같은 양기가 19세기까지 널리 통용되었다. 그러나 법전에서 규정한 양기가 민간에 그대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민가와 관부, 시장에서 쓰는 양기는 실제로는 조금씩 차이가 났는데, 마되의 경우 관가에서 쓰는 관되[官升]가 일반 민가에서 쓰는 식되[食升]보다 3작 정도 적게 담겼다. 장시에서 쓰는 장말[市斗]의 경우 민가나 관아에서 쓰는 집말[食斗]이나 관말[官斗]보다 용량이 조금 크게 제작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정승모, 『한국의 상거래』(도록), 국립민속박물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