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군 이융생(貞石君 李隆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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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석군 이융생 |
한글표제 | 정석군 이융생 |
한자표제 | 貞石君 李隆生 |
분야 | 왕족/왕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윤경수, 김구진 |
호 | 정석(貞石) |
봉작 | 정석군(貞石君), 정석도정(貞石都正), 정석정(貞石正) |
시호 | 정희(靖僖) |
출신 | 양반, 왕족 |
성별 | 남자 |
사망 | 1464년(세조 10)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개경(開京),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광주군 장이촌(長梨村)『선원계보』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선원강요』 |
증조부 | 이자춘(李子春) |
조부 | 이성계(李成桂): 태조(太祖) |
부 | 이방과(李芳果): 정종(定宗) |
모_외조 | 기자재(奇自在): 기숙의(奇淑儀), 궁인(宮人) 기씨(奇氏), 행주 기씨(幸州奇氏), 기면(奇勉)의 딸 |
형제 | (형)이군생(李群生): 순평군(順平君) (형)이의생(李義生): 금평군(錦平君) (동생)이선생(李善生): 무림군(茂林君) (누이)숙신옹주(淑愼翁主): 김세민(金世敏)의 처 |
처_장인 | 충주 권씨(忠州權氏): 권돈(權敦)의 딸 →(자녀)3녀 |
자녀 | (1녀)유정(柳*) (2녀)민계정(閔繼禎)의 처 (3녀)윤정(尹淀)의 처 (서1자)이유(李愉): 허천부수(虛川副守) (서2자)이연(李憐): 거성부수(車城副守) (서3자)이이(李怡): 마천부수(馬川副守) (서4자)이겸(李慊): 횡천부수(橫川副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석군 이융생(貞石君 李隆生) |
총론
[?~1464년(세조10) = 미상].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14왕자. 봉작(封爵)은 정석 도정(貞石都正)인데, 정석군(貞石君)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숙의 기씨(淑儀奇氏)는 행주 기씨(幸州奇氏)기면(奇勉)의 딸인데, 공안부(恭安府) 궁인(宮人) 출신으로 이름이 기자재(奇自在)라고 한다. 정석군은 기숙의가 낳은 4남 1녀 중에서 셋째아들인데, 동복형은 순평군(順平君)이군생(李群生), 금평군(錦平君)이의생(李義生)이고, 동복아우는 무림군(茂林君)이선생(李善生)이며 동복누이가 숙신옹주(淑愼翁主)이다.
은거 생활
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의 맏아들 진안대군(鎭安大君)이방우(李芳雨)는 고려 망엽에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우왕(禑王)을 몰아내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우자, 이에 반대하여 은거하였다. 그러므로 태조의 둘째 아들 이방과(李芳果)가 이방우 대신 적장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이성계의 아들 사이에 왕위 계승 문제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서, 태조는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고, 둘째아들 이방우가 왕위를 계승하여, 정종(定宗)이 되었다. 왕자의 난이 골육상쟁으로 비화된 것을 생각하여 정종은 왕위를 동생 이방원(李芳遠)에게 양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정석군이융생은 아버지 정종의 뜻을 사모하여, 조정에서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아버지 정종이 묻힌 황해도 개풍(開豊)의 후릉(厚陵) 근처에서 은거했다.
그러나 1439년(세종 21) 6월 음란 행위를 하였다고 탄핵을 받고, 이복형인 임성군(任城君)이호생(李好生), 도평군(桃平君)이말생(李末生)과 함께 고신(告身)과 구사(丘史)를 빼앗겼다. 1444년(세종 26) 7월 정3품상 명선대부(明善大夫) 정석정(貞石正)이 되었다. 1457년(세조 3) 6월 어머니 기숙의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해 12월 고신을 빼앗기고 외방으로 부처되었다가, 다음해 4월 충청도 홍주(洪州)에 부처(付處)되었다. 1459년(세조 5) 2월 다시 정석정이 되었다.
성리학 수학
아버지 정종의 후릉 근처 황해도 개풍에 은거하면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왕자로서 세상을 싫어하여 아버지 묘소의 근처에 살면서 은거 생활을 한 것은, 조선 초기의 왕자들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지나져 2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이복형제와 동모형제(同母兄弟)간에 인륜과 천리의 저버린 골육상쟁을 반성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는 고려 말엽에 들어온 성리학을 혼자서 탐구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이기(理氣)에 대한 학설과 태극(太極)에 대한 이론을 궁구(窮究)하면서 천리(天理)에 따라 자연 속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정석군이융생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단념하고 성리학에 심취하여,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대쪽같이 곧고 신념을 철석같이 지켰다. 정석군이융생은 성리학을 수학하여 학식과 문장이 뛰어났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매번 겸손히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그의 봉작을 정할 때에 그 이름을 “심성이 금석과 같이 곧고 굳세다.[貞固之性 金石之心]”하여 정석(貞石)이라고 하였다. <왕자의 난>과 같은 골육상쟁이 일어난 조선 왕조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 위해서, 황해도 개풍군 동흥면 교흥리 후릉 옆에서 은거했다. 그 뒤에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마다 그는 매우 통탄해 했다고 전해진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묘소는 『선원계보(璿源系譜)』에 따르면 경기도 광주군 장이촌(長梨村)이고, 『선원강요(璿源綱要)』에 따르면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이다. 1872년(고종 9)에 정석군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부인 충주 권씨(忠州權氏)는 직장(直長)권돈(權敦)의 딸인데, 3녀를 두었다. 1녀는 유정(柳*)의 처가 되었고, 2녀는 민계정(閔繼禎)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윤정(尹淀)의 처가 되었다. 첩의 소생으로 4남을 두었다. 1자는 허천부수(虛川副守) 이유(李愉)이고, 2자는 거성부수(車城副守) 이연(李憐)이며 3자는 마천부수(馬川副守) 이이(李怡)이고, 4자는 횡천부수(橫川副守) 이겸(李慊)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璿源系譜)』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행주 기씨 보략(幸州奇氏譜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