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초(壯抄)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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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초 |
한글표제 | 장초 |
한자표제 | 壯抄 |
동의어 | 장초군(壯抄軍) |
관련어 | 훈련도감(訓鍊都監), 총융청(摠戎廳), 둔장초(屯壯抄), 장초장관(壯抄將官), 장초포수(壯抄砲手)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직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서태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초(壯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25년 8월 26일 |
1639년 경기도 속오군 중 1천여 명을 선발하여 훈련도감에서 조련시키고 궁성을 숙위하게 하다가, 1750년 이후 번상(番上) 대신 신미(身米)를 납부하게 한 군병.
개설
장초는 장정을 뽑는다는 뜻도 있지만, 병자호란 후인 1639년(인조 17) 훈련대장겸총융사구굉이 경기도 속오군 중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한 1천여 명을 선발하여 훈련도감에 소속시킨 군병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초는 3교대로 번상(番上)하여 조련을 받고, 훈련도감의 북영이나 남영에 입직(入直)하여 궁성(宮城)의 숙위(宿衛)를 담당하였다. 장초군이 번(番)을 설 때 필요한 양식은 송도(松都) 속오군 1천여 명이 납부하는 쌀로 조달하였고, 장초군에게 조총 쏘기를 시험하여 상을 줌으로써 장초군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장초군은 1656년(효종 7) 소속이 총융청으로 바뀌었으며, 1750년(영조 26) 번상을 정지하고 신미 3두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한편 장초는 1884년(고종 21) 총융청이 폐지된 후 경기 감영에 이속되었다가, 1895년 지방군이 혁파될 때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장초는 ‘김포에 2초(哨), 통진에 2초, 부평에 2초, 인천에 1초, 남양·양천에 1초, 파주에 1초, 장단에 1초’ 등 10초로 구성되었고, 둔장초(屯壯抄) 3초도 설치되었다. 여기서 1초는 약 100명을 단위로 하는 군대 편제다. 장초는 10·11·12월 21일 세 차례 훈련도감의 북영이나 남영 등에 입번(立番)하였고, 장초군이 한 달간 번을 설 때 필요한 양식은 송도(松都) 속오군 1천여 명이 각각 20두씩 납부하는 쌀로 조달하였다(『인조실록』 25년 8월 26일). 실제로 장초군 원액 1,188명 중 병(病) 등으로 인해 995명만 입번한 1646년(인조 24)의 경우, 두 번째 입번군(再運軍)인 장초포수(壯抄砲手) 345명은 11월 21일 점검을 받았고, 22일 요미(料米)를 제공받았으며, 23일 초운군과 교체된 후 연습을 실시했다.
아울러 1664년(현종 5) 광지영(廣智營)에 입직한 총융청 장초군은 삼경(三更), 즉 밤 11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순라초관(巡邏哨官)의 인솔하에 궁궐 담장 밖을 순찰하였고, 1682년(숙종 8) 장초군 3초는 훈국·금위영 등과 함께 줄지어 서서 궁궐 담장을 호위하였다.
장초군에게는 번상을 마치고 돌아가기 직전 시재(試才)하여 상을 줌으로써 노고를 위로하였고, 경기도에 큰 흉년이 들거나 사신이 온 경우 등에는 번상을 정지하였다.
변천
장초는 1639년 구굉이 훈련대장겸총융사였을 때 경기도 속오군 중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한 자 1천여 명을 선발하여 훈련도감에 소속시킨 군병인데, 1656년 소속이 총융청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1750년 장초군의 번상을 정지하고 신미(身米) 3두(斗)를 납부하도록 하였고, 흉년이 심할 경우 1두당 4전씩 돈으로 납부하게 하였다. 이어 1884년 총융청이 폐지된 후에는 장초군은 경기 감영에 이속되었는데, 『승정원일기』의 1889년(고종 26) 기사에 경기감사가 옛 총융청 장초군의 신미 징수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서 그러한 변화를 알 수 있다. 한편 장초는 1895년 조선후기 지방군이 혁파될 때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