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자(壬辰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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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영조 48) 갑인자(甲寅字)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주조한 금속활자.

개설

임진자(壬辰字)는 1772년(영조 48) 동궁이었던 정조가 주청하여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의 인쇄본인 『심경』과 『만병회춘』을 자본으로 삼아 주조한 약 150,000자의 동활자이다. 1772년 3월 15일부터 6월 15일 전후로 약 3개월에 걸쳐 주조되었으며, 인쇄 출판을 담당했던 교서관에 보관되면서 서적의 인쇄에 널리 쓰였다.

내용 및 특징

임진자 활자 수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임진자의 자보(字譜)인 『신정자수』에 칠장주자(七欌鑄字)의 장별(欌別) 활자 수로 확인이 된다. 『신정자수』는 1772년에 주조한 임진자의 자보로 임진자의 활자별·부별·장별 수량을 기록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인 『신정자수』는 권수에 ‘춘궁(春宮)’·‘중광지장(重光之章)’·‘관물헌(觀物軒)’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다.

본문은 전체 활자를 109부로 세분하여 7개의 장으로 대별한 후 각 활자의 수량을 적었다. 활자의 수량은 권말에 칠장주자 구(舊) 34,848자, 신(新) 67,478자, 범(凡) 102,326자, 소자(小字) 구 39,582자, 신 859자, 범 40,441자로 기록하고 있어서 전체 142,767자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는 활자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신·구·대·소로 구분하였고, 주자에 관계되는 감동(監董)·사준(司準)·서리(書吏)·제원(諸員)·고직(庫直)·각수(刻手)·소로장(銷罏匠) 등 18명의 명단이 있다.

『신정자수』에 수록된 관련 인물은 모두가 교서관 관원으로 감동은 교리백사민(白師敏), 사준은 조광익(趙光益)·고시준(高時俊)·김우현(金禹鉉)·김신행(金信行)의 4명, 서리는 이석희(李錫禧)·정치후(鄭致厚)·이정량(李廷亮)의 3명, 제원은 오언기(吳彦基)·유동번(柳東蕃)의 2명, 고직은 이재화(李載華)였다. 각수는 남태백(南泰白)·유도창(劉道昌)·이만춘(李萬春)·전득춘(全得春) 등의 4명, 주물 작업을 맡은 소로장은 서복선(徐福先)·김찬경(金瓚璟)·엄덕승(嚴德升) 등 3명이었다.

임진자는 1777년(정조 1)에 더 주조한 정유자(丁酉字)와 활자 모양이 아주 닮아 그 식별이 매우 어려운 편이다. 정조조의 어정서(御定書)와 명찬서(命撰書)를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해제한 『군서표기』에 의하면 1772년에 인쇄한 『역학계몽집전』, 1773년(영조 49)에 인쇄한 『자치통감강목속편』, 1775년(영조 51)에 인쇄한 『경서정문』, 1777년에 인쇄한 『속명의록』, 1799년(정조 23)에 인쇄한 『아송』 등이 확실한 임진자의 인본들이다.

임진자가 주조된 구체적인 날짜는 『신정자수』에 수록된 서명응(徐命膺)의 「중전사서집석서(重鐫四書集釋敍)」의 내용을 쓴 시기가 7월이라는 점과, 주조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조선왕조실록』‘1772년(영조 48)의 기사[『영조실록』 48년 3월 15일]에 따라 1772년(영조 48) 3월 15일 이전부터 6월 15일 전후의 3개월 동안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1772년 6월에 주성된 150,000여 자의 임진자는 교서관인 운각(芸閣)에서 7개의 장(欌)에 나뉘어져 보관되면서 주로 교서관의 활자 인쇄에 쓰였다. 후에 육주갑인자(六鑄甲寅字)인 정유자가 더 만들어졌는데, 정유자가 화재로 소실된 후에도 임진자는 남아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현전하는 인본으로 마지막 시기에 간행한 임진자 인본은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국조보감』·『청구시초』 등이 알려져 있다. 『국조보감』·『청구시초』는 당시 신식 인쇄 기술의 영향으로 새로운 인쇄 방식 중의 하나인 석인(石印)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변천

임진자는 1772년 3월 15일부터 6월 15일 전후 약 3개월에 걸쳐 주조되었다. 주조 후에 교서관에 두었으며, 정유자는 규장각의 본원인 내각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는데, 책을 찍을 때는 감독을 맡은 각신(閣臣)이 당시 주로 이용했던 임진자·정유자·임인자(壬寅字, 재주한구자) 중 어떤 활자로 찍을 것인가를 왕에게 품의하여 사용하고, 다 쓰면 본래 있던 위치로 돌려보내서 간직하게 하였다.

이러한 관리 방식으로 유지해 오다가 1794년(정조 18)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마련한 주자소로 옮긴(『정조실록』 18년 12월 25일) 정유자가 1857년(철종 8)에 화재로 소실되자 그 이후에는 같은 모양의 두 활자 중 임진자만 사용되었으며, 그 실물 활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10여만 자가 소장되어 있으며,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 일제강점기에 임진자로 복원한 조판한 실물이 각각 남아 있다.

의의

영조시대의 금속활자를 사주갑인자(四鑄甲寅字)인 무신자(戊申字)로 본다면, 정조 대의 금속활자는 임진자와 5년 후에 가주(加鑄)한 정유자라 할 수 있다. 임진자와 정유자를 기반으로 간행된 서적은 이 시대에 지식과 정책을 보급하는 서적을 간행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특히 임진자는 현재까지도 그 실물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주조·조판, 인쇄 기술을 확인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 『신정자수(新訂字數)』
  • 김두종, 『한국고인쇄기술사』, 탐구당, 1974.
  • 남권희, 『조선초기 금속활자 특별전 도록』, 청주고인쇄박물관, 2003.
  • 백린, 『한국도서관사연구』, 한국도서관협회, 1969.
  • 윤병태, 『조선후기 활자와 책』, 범우사, 1992.
  • 천혜봉, 『한국금속활자본』, 범우사, 1993.
  • 『금속활자 주조 및 인쇄기술사 복원 연구 결과보고서』, 청주고인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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