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자(壬寅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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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정조 6) 평안감사서호수가 왕명에 의해서 주조한 금속활자.

개설

사주갑인자(四鑄甲寅字)인 무신자(戊申字)를 주조한 바 있는 김좌명(金佐明)의 아들 김석주(金錫冑)가 당시의 명필가 한구(韓構)로 하여금 글자를 쓰게 하여 자본(字本)으로 삼고 주조한 동활자가 초주한구자(初鑄韓構字)이다. 이를 1695년(숙종 21) 정부에서 구입하고, 1782년(정조 6) 서호수(徐浩修)가 80,000여 자를 만들어 내각(內閣)에 두고 사용한 것이 재주한구자(再鑄韓構字), 즉 임인자(壬寅字)이다.

한구자(韓構字)의 명칭은 처음의 주조 연대가 명확하지 않아서 간지명(干支名)을 붙이지 못하고 바탕 글자를 쓴 이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다. 김석주는 아버지 김좌명이 무신자를 주조할 때 관여했던 주자 기술자를 이용하여 활자를 만들었는데, 주조 연대를 1677년(숙종 3)경으로 추정하지만 그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구자는 세 차례에 걸쳐 개주(改鑄)되었으므로 초주한구자·재주한구자·삼주한구자(三鑄韓構字) 등으로 나뉘어 불리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임인자는 두 번째 주조한 재주한구자의 별칭이다. 초주한구자는 무신자를 주조하였던 김좌명의 아들 김석주가 숙종 초년인 1677년 무렵 당대의 명필가였던 한구의 독특한 필서체 글씨를 바탕으로 사사로이 주조한 동활자이다.

초주한구자는 김석주가 세상을 떠난 뒤 별로 이용되지 않고 김석주의 집에 간직되어 오다가 1695년 박태상(朴泰尙)의 주청으로 정부가 사들여 서적의 간행에 사용하였다. 초주한구자로 인쇄한 초기의 인본으로는 『자치통감강목』, 김석주가 편찬한 병서인 『행군수지』, 조부 김육(金堉)의 문집인 『잠곡선생유고』, 김석주의 외조부 신익성(申翊聖)의 『낙전당집』, 외숙 신최(申最)의『 춘소자집』, 신익성의 아우 신익전(申翊全)의 『동강집』등이 알려져 있다. 거의 대부분의 서적이 김석주와 관련 있는 인물의 저작물인 것이 특징이다.

숙종 말기 이후 영조 무렵의 인본에서는 활자의 마멸이 생기고 보자(補字)가 섞여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였다. 정조조에 들어와서 다시 주조하여 이를 내각에 두고 사용하였는데, 1782년 평안도관찰사였던 서호수가 왕명에 의하여 다시 주조한 동활자로 곧 임인자이다. 임인자는 1794(정조 18) 창경궁의 옛 홍문관 자리에 새로이 설치한 주자소로 옮겨 사용하였는데, 1857년(철종 8) 주자소에 불이 나서 활자가 소실되어 54,256자만이 남았다.

현전하는 임인자 인본으로 대표적인 책은 존현각(尊賢閣)에서 편찬한 것으로 조선 초기 이래의 홍문관·예문관 의 문장을 모아 엮은 『문원보불』과 『문원보불속편』, 정조 때 왕명으로 지은 초계문신(抄啓文臣)의 글 모음집인 『규화명선』, 남유용(南有容)의 문집인 『뇌연집』 등이 있다.

특히 정조의 인재 선발과 관련된 서적으로 당시 각 지역 유생들의 과문(科文) 등을 모은 『빈흥록』 류의 책이 1791년(정조 15)부터 1800년(정조 24)의 시기에 모두 간행되었다. 이 중에 성균관 유생과 음관(蔭官)의 과문을 모은 『경림문희록』, 제주도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취했을 때의 과문 등을 모은 『탐라빈흥록』, 초계문신 및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취했을 때의 과문 등을 모은 『정시문정』, 영흥과 함흥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취했을 때의 과문 등을 모은 『풍패빈흥록』 등이 임인자로 간행한 것이다.

임인자의 소실 이후 다시 주조한 삼주한구자는 1858(철종 9) 규장각 검교제학김병기(金炳冀), 규장각 제학윤정현(尹定鉉)과 김병국(金炳國) 등이 왕명에 의하여 주조한 동활자이다. 초주한구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나 재주한구자의 자수는 80,000여 자였고, 삼주한구자의 자수는 31,829자였다.

현재 한구자의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국립중앙박물관이며, 약 40,000여 자가 전해지고 있다. 한편 한구자의 자보(字譜)로 『한구자보』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남아 있다. 각 부수별 말미에 부수별 합계를 적은 첨지(籤紙)를 부착하였으며 장별 수량과 총계는 기록하지 않았다. 각 활자마다 붉은색으로 수정하거나 점검 표시를 하기도 하였으며, 종이를 덧붙이고 먹으로 글자를 쓴 것도 더러 보인다.

변천

임인자는 1782년(정조 6) 평안도관찰사였던 서호수가 왕명에 의하여 다시 주조한 동활자로, 1857년(철종 8) 10월 창경궁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어서 이듬해 정리자(整理字)와 함께 새로이 주성하게 되었다. 이 당시 주성된 활자의 수량과 소요 기간, 경비 등을 수록한 기록에는 “활자를 주성하는 역사(役事)는 1858년 무오년 초가을부터 시작하여 9월에 이르러 마쳤다. 정리자의 대자(大字)는 소실되고 남은 것이 63,969자이고 새로이 주조한 것이 89,449자로 합이 153,411자이며, 소자(小字)는 소실되고 남은 것이 59,307자이고 새로이 주조한 것이 39,417자로 합이 98,724자이다. 한구자는 소실되고 남은 것이 54,256자이고 새로이 주조한 것이 31,834자로 합이 84,256자이다. 도합(都合)한 자수는 338,225자이며 소실되고 남은 합이 177,532자이고 새로이 주조한 합이 160,693자이다. 소용된 물력은 20,000여 냥이었다”고 나와 있다.

즉 임인자는 1857년 10월 창경궁에서 발생한 화재로 주자소까지 불타 버려 당시 54,256자만이 남았으며, 이에 정부에서 이듬해인 1858년에 김병기·윤정현·김병국 등에 명하여 다시 주조하게 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현재 약 40,000여 자의 활자가 남아서 전해진다.

의의

서적의 생산과 유통에 있어서 활자의 주조가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 주조와 조판의 기술, 종이와 먹의 생산 등이 함께 어우러져서 만들어지는 서적은 활자의 주조 단계에서 그 품질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활자가 생산되고 활용되었지만 대부분이 전해지지 않으며, 일부라도 남아서 전해지는 금속 활자는 불과 몇 종에 불과하다. 임인자는 사라질 위기를 넘긴 몇 종의 현전 금속 활자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활자이다. 40,000여 자가 남아서 현전하는 한구자에 대한 구체적인 활자 정리를 통해서 재주한구자인 임인자와 삼주한구자를 구분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생생자보(生生字譜)』
  • 김두종, 『한국고인쇄기술사』, 탐구당, 1974.
  • 백린, 『한국도서관사연구』, 한국도서관협회, 1969.
  • 윤병태, 『조선후기 활자와 책』, 범우사, 1992.
  • 천혜봉, 『한국목활자본』, 범우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