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고서원(臨皐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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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년(명종 8)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세워진 서원.

개설

임고서원은 백운동서원·남계서원과 함께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져 사액된 서원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고서원 관련 기사가 다섯 건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1554년(명종 9) 임고서원 사액 기사, 해주 수양서원(문헌서원) 사액 당시 편액과 서적의 지급을 임고서원의 예로 시행하라는 기사, 함양 남계서원 청액 상소에서 임고서원의 건립 사실을 예로 든 기사, 1663년(인조 21) 임고서원에 장현광(張顯光)의 병향(並享)을 청하는 상소, 1724년(영조 즉위) 임고서원의 위전(位田)을 탈취당한 사건에 대한 기사 등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이후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서원 건립 활동을 통해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임고서원은 명종 연간 이황을 중심으로 추진된 사림계의 서원 건립 운동에 따라 1553년(명종 8) 영천의 노수(盧遂)·김응생(金應生) 등의 발의로 정몽주(鄭夢周)가 생장하였던 영천 임고에 건립되었는데, 정몽주를 제향하던 사묘가 모태가 되었다.

임고서원은 문묘에 종사된 포은(圃隱)정몽주를 제향한 도학서원(道學書院)으로 창건 때부터 사림 활동의 중심지로 인식되었고, 경상도 일원을 중심으로 초기 서원 정착에 큰 영향을 미쳐 이후 건립되는 여러 지역 서원들의 전범으로 인식되었다. 임고서원이 세워지자 경상도 각처의 사림들의 지원이 이어졌고, 특히 초기 서원 건립의 중심인물이던 이황은 봉안문(奉安文)을 친히 찬하였고, 왕에게 하사받은 『성리군서(性理群書)』 한 질을 임고서원에 기증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임고서원의 원임(院任)은 원장(院長)·유사(有司) 체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대체로 영남 지역의 서원은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등의 예에서 살필 수 있듯이 원장과 유사로 직무가 분화되어 갔다. 원장은 겸임제로 운영되며 서원 재정에 대한 감독과 원생의 입원(入院)과 교육을 총괄하고 유사 및 원속(院屬)의 임명·감독·처벌 등에 대한 권한을 가졌다. 유사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유생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공궤(供饋), 원곡(院穀)의 분급, 문서 검열, 세입 세출의 담당 등이었다.

임고서원의 운영과 관련한 원규는 『서원규범(書院規範)』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대체로 경상도 여러 서원의 원규는 이황의 서원 인식이 반영된 「이산원규(伊山院規)」를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는데 도산서원·천곡서원·병산서원의 원규 등이 대표적이다. 『서원규범』도 이황의 「이산원규」를 기본으로 하고 도산서원과 천곡서원의 학규 등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구성은 거업(居業), 권과(勸課), 방검(防檢), 교제(交際), 양현(養賢), 수원우(修院宇)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변천

1534년(명종 9) 11월 2일 경상감사정언각(鄭彦慤)이 임고서원의 사액을 요청하여 윤허를 받았다(『명종실록』 9년 11월 2일). 조정에서는 ‘임고서원(臨皐書院)’ 편액을 내림과 아울러 원유들의 학업을 위하여 노비와 전결(田結), 『소미통감(少微通鑑)』·『통감속편(通鑑續編)』 등의 서책을 하사하였다. 또한 인근 지역인 금산(金山)·의흥(義興)·하양(河陽) 등지의 위전이 이속되면서 재정적인 기반을 충실히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 중건하였고, 이듬해 경상감사이시발(李時發)이 중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전해 오는 관례에 따라 다시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고서원의 경제 기반은 18세기 위전이 탈취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지만, 대체로 서원 훼철 때까지 유지되었다.

17세기 이후 서원이 증가하고, 정파와 학파 간의 상호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제향에 따른 위차(位次)의 선후 문제는 사족들의 초미의 관심사였고, 이에 따라 각종 갈등과 시비가 나타났다. 임고서원도 영천과 인연이 깊은 장현광을 제향하는 과정에서 위차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났다. 논란은 장현광의 문인들이 자신들의 학통을 강화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장현광의 임고서원 제향 시도는 장현광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째 되는 1642년(인조 20)에 제기되었다. 이 시기는 장현광의 문인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로 추숭의 열기 또한 매우 높았던 시기였다. 인동과 성주 등지의 서원에 장현광의 위패를 모셨고, 『여헌집(旅軒集)』의 초간본을 간행하는 등 학통의 계승을 위한 시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임고서원의 합향론(合享論)도 제기되었다.

장현광의 문인들은 임고서원의 합향을 통해 자신들의 학문적·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천 지역 장현광의 문인들과 이를 지원했던 인동과 선산 지역 문인들의 의도가 접합함으로써 논쟁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장현광의 문인들은 임고서원에 스승을 제향할 때 위차를 병향으로 결정하였다. 병향이란 위차를 배치할 때 선후의 구분이 없이 나란히 놓는다는 뜻이다. 장현광의 학문이 정몽주를 계승하였다기보다는 자득(自得)의 경지에 올랐음을 드러내어 여헌 학맥의 독자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당시 일반 사림들의 인식과 큰 차이를 보여, 경향에서 제기된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향중에서 병향을 강행하려던 장현광의 문인 장학(張澩) 등과 이에 반대하여 배향(配享)을 주장한 조호익(曺好益) 문인 간의 의견 대립은 점차 확산되어, 상호간에 통문(通文)을 발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강변하는 과정에서 유벌(儒罰)이 가해지고 비방이 심해져 갔다.

1643년(인조 21) 4월 24일 전 첨정 정준(鄭儁)은 위차를 둘러싼 논란을 조정에 상소하였다(『인조실록』 21년 4월 24일). 정준은 상소에서 장현광을 임고서원에 병향한 과실을 지적하고, 정몽주를 제향한 경기도 용인의 충렬서원(忠烈書院)과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의 예를 들어 배향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즉 충렬서원에는 조광조(趙光祖)가 배향되었고, 숭양서원에는 서경덕(徐敬德)이 배향되었는데, 유독 임고서원만 장현광을 병향할 수 없다는 것이 상소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에 예조에서는 ‘서원 향례(享禮)의 위차는 조정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림의 공론에 달려 있지만, 임고서원에 장현광을 병향한 것은 잘못되었으므로 배향으로 고치는 것이 옳다’는 요지로 회계하여 인조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함께 성균관과 충렬서원 등지에서 배향을 지지하는 통문을 보내옴으로써 임고서원의 위차는 배향으로 결정되었다.

임고서원의 위차를 둘러싼 논란은 사림 정치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서원의 문제가 향중에 국한되지 않고 중앙 세력에까지 파급되어 갔던 당시의 상황을 살필 수 있게 한다. 또한 사림계가 추구했던 서로 다른 계승 의식은 후일 학통의 계보를 수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으로 그 사회적 의미를 살필 수 있다.

1787년(정조 11)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영천이 본관인 황보인은 세종대의 명신으로 계유정난으로 피살된 뒤 장릉(莊陵) 충신단에 제향된 인물이다. 또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장릉 충신단에 배식(配食)된 정분(鄭苯)도 추가로 배향되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5년 정몽주의 위패만을 봉안하여 복원하였고, 2001년에는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하였다.

의의

서원 발흥기에 건립된 임고서원은 초기 서원의 확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사림 정치가 본격화하던 1643년 장현광의 제향을 둘러싼 위차 논란은 서로 다른 학통 인식에 따른 이견이 갈등으로 드러난 사례라 볼 수 있다. 실록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고 현전하는 『임고서원지(臨皐書院誌)』와 관련 문서들을 종합한다면 조선시대 서원 제도 운영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임고서원지(臨皐書院誌)』
  •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 김학수, 『17세기 영남학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