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벌(儒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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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이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였을 때 재회(齋會)에서 유생에게 내리던 벌.

개설

유벌은 성균관 유생이 자치기구인 재회에서 동료들을 대상으로 결정해 시행하는 자치 행위의 일종이다. 조정에서는 유생 사회의 공론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유벌을 받은 자에게 과거 응시 제한 등의 불이익을 가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국가의 공권력을 제한하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의견이 개진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유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유벌은 재회에서 결정되는데, 성균관 유생 임원의 우두머리인 장의(掌議)가 유벌 결정을 주도한다. 성균관 유생 가운데 선출된 임원인 재임(齋任)이 유벌에 관한 말을 꺼내면 수복(守僕)이 참석자들에게 공표하였다. 재임의 의견이 공론(公論)과 거리가 있더라도 참석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벌의 종류는 먹으로 이름을 지우는 묵삭(墨削), 북을 치고 성토하면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명고영삭(鳴鼓永削), 누런 종이를 붙여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부황영삭(付黃永削), 영구히 학교에서 쫓아내는 영손(永損), 그냥 학교에서 쫓아내는 손도(損徒), 영구히 기숙사에서 쫓아내는 영출재(永黜齋), 그냥 기숙사에서 쫓아내는 출재(黜齋) 등이 있었다. 성균관 기재생(寄齋生)과 사학유생으로 식당에서 식사할 수 있는 유생 명부인 도기(到記)에서 이름이 영구히 지워지는 식손유영간(食損唯永刊)도 있었다.

장의가 벌의 명칭을 선언하는데, 중벌일 경우 대개 영삭부황, 영삭, 영손 중의 하나를 주었다. 벌을 주는 이유는 여덟 자(字)로 작성한다. 그것을 기록한 후 색장(色掌)과 장의가 그 아래 서명하였다. 그러면 수복이 서쪽 첫째 방의 외벽 위에 갖다 붙였다.

벌을 해제할 때는 벽 위의 별지를 떼어 와서 조사(曹司)에게 가위표(×)를 하도록 시켰다. 출재와 영출재의 경우에는 애초 글은 없이 단지 말로만 벌의 명칭을 선언했기 때문에 들어오라 권할 때도 역시 말로 하였다.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벌을 받은 유생은 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를 막론하고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설사 합격하였더라도 취소시키고 이어 죄를 논하라고 하였다. 『속대전』에는 설사 알성시·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하여도 응시를 허락하지 말라고 하였다.

변천

광해군 때에 성균관 유생인 김육(金堉) 등이 정인홍(鄭仁弘)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당시 정인홍이 문원공(文元公)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이황(李滉)을 비방하고 배척하면서 문묘 종사(從祀)가 합당치 않다고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그 이름을 성균관 유생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한 것이다.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주동한 유생을 유적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시키라고 명령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1월 24일). 이에 성균관의 여러 유생이 일종의 동맹휴학인 권당(捲堂)을 결행했고, 이조 판서이정구(李廷龜)가 대궐에 이르러 진계(陳啓)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그 명령을 보류하였다.

1681년(숙종 7) 대사성김만중(金萬重)은 유벌을 받은 사람이 그 벌에서 풀려나기 전에는 학궁(學宮)의 과제(課製)에 나아갈 수 없게 하되, 과거 응시에 있어서는 조사(朝士)로서 삭직(削職)된 사람이 응시하는 예와 같이 모두 응시를 허락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숙종실록』 7년 6월 2일]. 그러나 식년시와 별시에는 응시하지 못했지만 정시·알성시 응시는 허락하였다.

유벌 가운데 부황영삭은 주로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그 대상이 되곤 했는데, 『속대전』에 이르러 관원에 대한 부황영삭을 금지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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