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문(仁和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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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인화문 |
한글표제 | 인화문 |
한자표제 | 仁和門 |
상위어 | 창덕궁(昌德宮) |
관련어 | 궁궐(宮闕), 동궐(東闕), 선정전(宣政殿), 인정전(仁政殿), 창경궁(昌慶宮), 편전(便殿), 합문(閤門)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신지혜 |
장소 |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의 동행각의 북편 |
관련 인물 | 현종, 숙종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인화문(仁和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15년 12월 18일, 『숙종실록보궐정오』 즉위년 8월 26일, 『연산군일기』 1년 2월 8일 |
창덕궁 선정전에서 인정전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위치하는 문.
개설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참(朝參)·왕세자 책봉·중국 사신 맞이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왕은 의례복을 갖추어 입고 선정전(宣政殿)에서 기다린다. 의례 준비가 완료되면 왕에게 보고하고 왕은 선정전의 분합문(分閤門) 밖에서 소여(小輿)를 타고 인화문을 나가 인정전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인화문은 창덕궁의 편전이 되는 선정전의 합문(閤門)으로 활용된 곳이라 생각된다.
상례(喪禮)에서 선정전에 빈전이 설치되었을 경우의 의식 순서는 다음과 같다. 시신이 안치된 관인 재궁(梓宮)을 발인하여 궁궐을 나선다. 이때 선정전 분합문 밖에서 윤여를 태워 서편으로 이어지는 일덕문(一德門)을 지나 인화문을 지난다. 인정전 뒷마당으로 해서 인정전 안에 들렀다가, 인정전 앞에서 견여(肩輿)를 태워 돈화문(敦化門)으로 나간다.
인화문은 왕이 선정전에 임어하였다가 인정전으로 이동할 때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인화문을 이용하면 편리하기 때문이다. 선정전의 정문인 선정문을 통해 인정전의 동문인 광범문(光範門)을 통해 움직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선정문 밖에는 궐내에 마련된 여러 각사(各司)가 자리 잡고 있어 번잡했다.
위치 및 용도
인화문은 창덕궁에 있는 문 가운데 하나이다. 인화문과 그 주변에 대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창덕궁을 그림으로 기록한 「동궐도(東闕圖)」와 「동궐도형(東闕圖形)」이 있다. 그런데 두 그림에서 인화문이 있는 위치가 다르다. 1824년(순조 24)에서 1833년(순조 33)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동궐도」에는 인화문과 일덕문(一德門)의 남쪽으로 약간 물려 사이에 관광청(觀光廳)이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동궐도형」에는 인화문과 일덕문 사이를 잇는 복도각이 그려져 있어 차이점을 보인다. 왕이 의례를 위해 예복을 갖추고 오가는 경로이며, 왕이나 왕후의 재궁이 발인하는 경로가 되므로 복도각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또 1560년(명종 15)에는 인화문의 내랑(內廊)에서 소대에 참여한 경연관들에게 술을 내리고(『명종실록』 15년 12월 18일), 1674년(숙종 즉위)에 현종의 빈전에 조문을 온 청나라 사신을 인화문 안에서 접견한 것으로 보아 인화문과 일덕문 사이에 행각이 있어 내부 공간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숙종실록보궐정오』 즉위년 8월 26일).
변천 및 현황
1495년(연산군 1)에 성종의 빈전이 선정전에 마련되었다(『연산군일기』 1년 2월 8일). 발인하는 날에 재궁을 옮기기 위한 경로를 왕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정문을 통해 연영문(延英門)을 지나 빈청(賓廳) 앞을 경유하여 진선문(進善門)으로 가는 것은 잡인의 통제가 어렵고 길이 협착하다고 하였다. 때문에 인화문을 통해 인정전 앞마당을 거쳐 나가는 것으로 하였다. 이후 선정전에 빈전이 마련될 경우, 재궁은 인화문을 거쳐 인정전에 들러 인정문을 지나 돈화문으로 나가는 경로가 정례화되었다.
인정전에서 의례를 마치고 왕이 인화문을 통해 대내(大內)로 들어가기 때문에 인화문은 대내와 경계가 되는 문으로 상징성이 있다. 대내는 궁궐의 정전 즉 공식적인 의례가 행해지는 외전과 달리 사적인 영역을 의미한다. 편전과 침전이 대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종과 숙종은 모두 인정전에서 즉위 의식을 마치고 인화문을 통해 대내로 들어갔다. 선왕의 빈전이 선정전에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정전 앞마당에 마련된 여차에서 나와 연영문을 지나 숙장문(肅章門)을 통해 인정문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인정문에서 즉위 의식을 거행한 후, 인정전 앞마당을 통해 인화문으로 들어갔다.
조선후기에는 희정당(熙政堂)을 편전으로 자주 사용하였다. 이때 인정전에서 의례를 행하면 희정당에서 왕이 머물렀다가 협양문(協陽門)을 거쳐 숙장문을 통해 인정문을 지나 인정전의 앞마당으로 이르렀다. 의례를 마치면 다시 같은 경로로 퇴장하지 않고, 가까운 인화문을 이용하여 대내로 들어갔다.
1701년(숙종 27) 경덕궁으로 이어할 때에도 선정전에서 소여(小輿)를 타고 인화문을 나와서 인정전을 거쳐 경덕궁으로 갔다.
참고문헌
- 「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동궐도 읽기』, 창덕궁관리소, 2005.
-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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