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현군 이곤(翼峴君 李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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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익현군 이곤 |
한글표제 | 익현군 이곤 |
한자표제 | 翼峴君 李璭 |
분야 | 왕족/왕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윤경수, 김구진 |
자 | 광지(光之) |
봉작 | 익현군(翼峴君) |
시호 | 충성(忠成) |
출신 | 양반, 왕족 |
성별 | 남자 |
출생 | 1431년(세종 13) |
사망 | 1463년(세조 9) 5월 4일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남양주시 진건면 용정 4리 |
증조부 | 이자춘(李子春) |
조부 | 이성계(李成桂): 태조(太祖) |
부 | 이도(李*): 세종(世宗) |
모_외조 | 김신빈(金愼嬪): 청풍 김씨(淸風金氏), 김원(金元)의 딸 |
형제 | (형)이증(李璔): 계양군(桂陽君) (형)이공(李玒): 의창군(義昌君) (형)이침(李琛): 밀성군(密城君) (동생)이당(李瑭): 영해군(寧海君) (동생)이거(李璖): 담양군(潭陽君) |
처_장인 | 평양 조씨(平壤趙氏): 조철산(趙鐵山)의 딸, 조견(趙狷)의 손녀 →(자녀)1남 1녀 |
자녀 | (1자)이지(李漬): 괴산정(槐山正), 괴산군(槐山君) (1녀)여종경(呂宗敬)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익현군 이곤(翼峴君 李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세조 9년 윤7월 4일 |
총론
[1431년(세종 13)∼1463년(세조 9) = 33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서출 10남 2녀 중에서 제 7왕자. 봉작(封爵)은 익현군(翼峴君)이고, 자는 광지(光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김신빈(金愼嬪)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서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김원(金元)의 딸이다. 김신빈이 낳은 아들 6명 중에서 넷째인데, 동복형이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 의창군(義昌君)이강(李玒),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이고, 동복아우가 영해군(寧海君)이당(李瑭), 담양군(潭陽君)이거(李璖)다.
세조 시대의 활동
1431년(세종 13)에 출생하여 1437년(세종 19) 12월 나이 7세 때에 익현군에 봉해졌다. 1450년 나이 20세 때 세종이 승하하자, 어머니 김신빈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9월 세조가 공신을 책봉할 때 동복형인 계양군이증, 영천위(鈴川尉)윤사로(尹師路), 한확(韓確), 권남(權擥),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에 책훈되어, 수충 위사 동덕 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이란 칭호를 받았다. 세조는 단종을 보호하거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벌받은 이들의 가산을 적몰하고 이를 종친과 공신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익현군도 여러 차례 ‘역적’의 집과 토지 등을 하사받았다. 1456년(세조 2) 3월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여흥(驪興)에 있는 집과 토지를 하사받았다. 이를 통해 익현군이관이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1454년(단종 2) 8월 동복형 계양군이증이 영천위윤사로와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금성대군이 의심스럽다고 밀고할 때 수춘군(壽春君)이현(李玹)과 익현군이관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이것도 익현군이관이 수양대군을 도운 결과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할 때 그의 나이가 25세였는데, 세조는 그를 사랑하고 신임하였다. 세조는 익현군을 불러서 각종 연회에 시연(侍宴)하게 하였고, 궁중 음식을 시식(侍食)하게 하였으며, 궁중 밖에서 관사(觀射)와 사냥에도 반드시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1458년(세조 1) 11월 익현군이관이 남양(南陽)에 갔다가 낙마(落馬)하였을 때, 세조가 그의 형 계양군이증과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고, 경기도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그를 곡진하게 보살펴 주도록 명하였다. 이해 12월 세조는 청계산(淸溪山)에서 사냥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익현군이관의 집에 들러 그를 문병하였다. 1460년(세조 6) 세조가 정희왕후(貞熹王后)와 함께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행하였을 때, 익현군이관도 호종하였다. 1461년(세조 7) 10월 세조가 풍양(豐壤)에서 강무(講武)를 하였는데, 익현군이관을 대장(隊長)으로 삼아서, 그의 무예를 시험하였다. 이해 12월 세조의 명으로, 계양군이증, 병조 판서김사우(金師禹) 등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중국에서 명(明)나라 사신으로부터 활쏘기 시합을 관전하는 의식을 익혔는데, 이것을 관사의(觀射儀)하고 한다.
1463년(세조 9) 5월 4일 속병으로 졸하였는데, 향년이 33세였다.
성품과 일화
『세조실록』의「익현군 이관 졸기」에서, “그의 성품은 호탕하고 용감하였다. 사람의 뜻을 잘 맞추어서 좌익 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세조가 매우 중하게 여기었다.”고 하여[『세조실록』세조 9년 5월 4일 「익현군 이관 졸기」] 성격이 호탕하여 얽매이기를 싫어하고 강단이 있어서 용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조가 그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가 졸하자, 세조가 탄식하기를, “이것은 모두 계양군의 허물이다. 의창군이 술로써 죽었는데, 익현군도 또한 술로써 죽으니, 내가 매우 슬프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이렇게 말한 것에 대해 실록의 졸기에서 부연(敷衍)하기를, “형 계양군이증과 더불어 사악한 사람[邪人]들과 사귀더니, 창사(倉使)윤오(尹塢), 전 현감(縣監)성계증(成繼曾) 등과 술을 퍼마시는 술꾼[酒徒]가 되어, 밤이면 여염(閭閻)의 작은 술집에 모여서 창기(倡妓)를 불러 놓고 여럿이 돌아가면서 폭음(暴飮)하였다. 이로 인하여 술병을 얻어서, 몸이 파리하고 쇠약해지더니, 결국 피를 토하고 졸(卒)하였다.”고 하였다.
매일 밤마다 익현군은 술꾼들과 함께 어울려서 창기(娼妓)를 불러놓고 술을 폭음하다가, 술에 몹시 취하여 창기와 사통(私通)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창기는 그의 숙부 효령대군(孝寧大君)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옥부향(玉膚香)이라는 기생이었다. 이에 익현군이 효령대군의 애기(愛妓)인 옥부향과 사통(私通)하였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때 숙부 효령대군은 68세였고, 조카 익현군은 33세였다.(『세조실록』 세조 9년 윤7월 4일)
묘소와 후손
1463년(세조 9) 시호를 충성(忠成)이라 내렸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 4리 637번지에 있다.
부인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조철산(趙鐵山)의 딸이자,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조견(趙狷)의 손녀이다.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1자는 괴산군(槐山君)이지(李漬)이고, 1녀는 여종경(呂宗敬)의 처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용재총화(慵齋叢話)』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역사(海東繹史)』
- 『삼탄집(三灘集)』
- 『매산집(梅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