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의(李在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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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08년(순조 8)~1868년(고종 5) = 61세]. 조선 후기 헌종(憲宗)~고종(高宗) 때의 천주교도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토마스. 본관은 평창(平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택규(李宅逵)이며, 어머니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홍낙교(洪樂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참판(參判)이동욱(李東郁)이다.

헌종~고종 시대 활동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재의(李在誼)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익히게 되었고, 정하상(丁夏祥)과 반년 가까이 동거를 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1837년(헌종 3) 앵베르(Imbert) 주교가 조선 선교를 위해 입국하자 그의 전교 활동 및 시중을 돕는 복사가 되어 전교활동을 도왔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발발하여 앵베르 주교는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나, 이재의는 홍주로 피신하여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이후 박해가 잠잠해지자 현석문(玄錫文) 등이 박해로 순교한 이들의 자료를 모아 『기해일기(己亥日記)』를 편찬하는 것을 도왔다.

1845년(헌종 11) 1월 김대건(金大建)이 부제가 되어 입국할 때 의주 변문에 가서 그를 서울로 인도하였으며, 김대건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때 현석문·최형(崔炯) 등과 함께 동행 하여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김대건 부제의 사제서품식에 참석하였다. 이어 그해 9월 페레올(Ferréol) 주교를 비롯하여 김대건·다블뤼(Daveluy) 신부가 강경 지역으로 비밀리에 입국할 때 함께 돌아왔다.

이후 이재의는 페레올 주교의 전교활동을 옆에서 보조하다가, 1846년(헌종 11) <병오박해(丙午迫害)>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연루자로 붙잡혔으나 배교를 약속하고 풀려났다. 이후 1866년(고종 3)부터 시작된 조선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여파로 1868년(고종 5) 윤4월에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고 모반부도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종실록(高宗實錄)』 5년 윤4월 6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5년 윤4월 6일],[『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그는 판결이 내려진 다음날인 1868년 윤4월 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승정원일기』 고종 5년 윤4월 7일]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우포도청등록(右捕盜廳謄錄)』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9,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