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보(以德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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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교린 관련 국서에 사용한 어보.

개설

이덕보(以德寶)는 ‘위정이덕보(爲政以德寶)’라고도 하며 교린(交隣) 관련 국서(國書)에 찍는 어보이다. ‘위정이덕’의 전고는 “공자가 말하기를, 정사(政事)를 덕(德)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北極星)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여러 별들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는 『논어(論語)』「위정」 편 제1장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동아시아의 국가 사이에는 여러 가지 통교(通交) 관계가 있었다. 조선은 명과 청에 대해서는 사대·책봉 관계, 일본과는 대등 교린이라는 이중 외교 정책을 펼쳐 왔다. 통교 관계를 맺은 국가는 관계 형태에 따라 한문으로 작성된 일정한 양식의 외교 문서를 주고받으며 상호 관계를 지속하였다.

조선은 일본과 국서와 서계(書契)라는 서식을 정하여 상호간에 외교 문서를 주고받았다. 조선시대 대일 관계사에 있어서 국서란 최고 통치자 간에 왕래한 문서를 말한다. 『통문관지(通文館志)』, 『춘관지(春官志)』,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등 조선시대 대일 외교를 기록한 문헌에서는 왕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인 국서식(國書式)과 예조 이하의 위치에서 교환하는 서계식(書契式)을 명백히 구분하였다. 따라서 국서란 조선의 왕과 일본의 최고 외교권자 간에 왕래한 문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국서에 쓰는 어보인 위정이덕보는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성종대 이전에 이미 은으로 제작한 어보가 쓰였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아 있는 문서 가운데 위정이덕보를 안보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로는 1500년(연산군 6)에 제작된 「조선국왕이융국서(朝鮮國王李㦕國書)」가 있다. 외교 관계 사료집에서 제시한 국서식과 같이 겉봉의 접합부에 기재된 성휘 부분에 1방, 내식의 성휘 부분에 2방을 안보하였다.

교린 국서의 안보 사례를 통해 볼 때 조선전기부터 후기까지 사용한 이덕보는 대략 4과이다. 첫 번째 어보는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1500년에 작성된 국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체는 소전으로 간명하게 제작하였으며, 기록을 통하여 은으로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이덕보는 1606년(선조 39)에 만들었다. 이를 만든 계기는 당시 회답사(回答使)가 가지고 갈 국서에 사용할 어보가 목제이며 모양이 거칠어 구차하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예조의 건의 때문이었다. 이때 새로 만든 어보는 첫 번째 어보를 모방한 듯하나, 글자의 획이 곡선이나 사선에서 직선화하는 경향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세 번째 이덕보는 1617년(광해군 9)에 제작하였다. 새로 제작한 계기는 당시 일본에서 화친을 청해 옴에 따라 회답사를 보내면서 국서에 사용할 어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본래 이덕보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보관하면서 일본과 수답할 때 으레 사용하였는데, 임진왜란 중에 잃어버렸다가 이때 공조(工曹)에서 개주하기를 청하고 예조의 의논에 의해 새로 만들게 되었다. 인문을 보면 첫 번째나 두 번째 이덕보를 모방한 듯하나, 곽광(廓廣)이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넓어졌다.

네 번째 어보는 언제 만들었는지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1682년(숙종 8)에 작성한 국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어보는 이전의 이덕보가 대개 전대의 것을 모방하였음에 비해, 새로운 서체로 변화시킨 점이 특징이다. 앞의 어보들은 조선전기에 소전으로 제작한 어보에 모방을 거듭한 반면 새로 제작한 어보는 첩전으로 매 글자마다 9획을 정확히 지킨 점이 특징이다.

조선후기 일본에 보낸 국서와 서계는 여러 사료들을 통해 서식과 내용을 상당 부분 파악할 수 있다. 국서는 1606년(선조 39)부터 1811년(순조 11)까지 14회에 걸쳐 일본에 보냈는데, 1606년 국서를 제외하고는 내용을 알 수 있다. 서계의 경우도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의 『대마도종가관계문서』에 조선에서 대마도에 보낸 각종 서계의 원본 총 9,442점이 남아 있어 이들 사료를 통해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물론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생생하게 재현해 볼 수 있다. 조선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들은 모두 일정한 격식에 따라 작성되었으며, 여러 외교 관계 사료집에는 국서식과 서계식의 항목을 통해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국서와 서계는 모두 겉봉을 쓰는 외식(外式)과 내용을 적는 내식(內式)으로 구분하였다. 먼저 국서의 외식을 살펴보면, 오른쪽 가에는 ‘봉서(奉書)’라 쓰고, 왼쪽 가에는 ‘일본국대군전하(日本國大君殿下)’라고 썼다. 주(註)에서는 처음에는 ‘일본국왕(日本國王)’이라 일컬었는데, 1636년(인조 14)에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으로 고쳤다가, 1711년(숙종 37)에 다시 ‘일본국왕’으로 바꾸었고, 1719년에 또다시 ‘일본국대군’으로 개칭한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봉(奉)’ 자와 ‘일(日)’ 자를 나란히 쓰고, ‘서(書)’ 자와 ‘하(下)’ 자를 나란히 쓴다. 마주 붙인 곳에는 ‘조선국왕(朝鮮國王) 성휘(姓諱) 근봉(謹封)’이라 쓰고, 글자를 띄어 쓴 곳에는 ‘위정이덕’이라 새긴 어보를 두며, 성과 휘를 쓴 곳에는 모두 어보를 찍는다고 규정하였다.

국서의 내식은 ‘조선국왕 성휘 봉서’라 쓰고, 사첩(四帖) 한가운데에 평행으로 ‘일본국대군전하’라고 쓴다. 이 경우도 ‘조(朝)’ 자와 ‘일’ 자, ‘서’ 자와 ‘하’ 자를 평행으로 나란히 쓴다. 그리고 오첩(五帖)의 평행에서 시작하여 내용을 쓰고 끝에 ‘불비(不備)’라 쓴 다음, 평행으로 ‘○년○월’이라 쓰고, 말첩 가운데 2행부터 ‘조선국왕 성휘’를 쓰되 연월일과 가지런하게 썼다.

국서를 담는 궤는 은으로 장식하고 붉은 칠을 올린 위에 금으로 용을 그렸다. 작성된 국서는 금으로 용을 그린 홍단갑보(紅段甲褓)로 싸서 궤에 넣은 후, 다시 금으로 용을 그린 홍초갑보(紅綃甲褓)로 쌌다. 이덕보는 외식의 성휘 부분에 1방, 내식의 성휘 부분에 2방을 두었고, 물품을 보낸 목록을 별폭으로 제작한 경우 문서의 끝에 1방을 두었다.

국서가 왕 또는 왕적 존재 간의 서신이라면, 서계는 예조 이하와 대마도 간에 교환한 외교 문서이다. 예를 들면 예조(禮曹) 참판(參判)과 막부노중, 예조 참의(參義)와 대마주태수, 또는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와 대마주태수가 주고받은 문서 등이 모두 서계에 포함된다. 서계식을 제시한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인장을 ‘도서(圖書)’라 기재하였다. 도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인장인 사인(私印)을 의미하여 관인(官印)과 구분한다. 공적인 성격의 외교 문서에 사용하는 인장을 ‘도서’라 칭한 점이 특징이다. 실제 문서를 통해 보면 17세기 초를 기점으로 이전의 문서는 사인 성격의 인장을 사용하다가, 이후로는 관인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난다.

17세기 초 이전에 사용한 사인은 ‘초계정씨(草溪鄭氏)’와 같이 본관에 성씨를 더하여 인문을 구성하였으며, 서체는 관인에서 흔히 쓰이는 첩전(疊篆)으로 하였다. 또한 곽광도 관인처럼 넓게 하여 인문을 읽기 전에는 마치 관인을 보는 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인장은 발신자가 개인적으로 만들지 않고 관인을 담당한 예조의 계제사(稽制司)에서 제작하였으리라 여겨진다. 한편 17세기 초 이후 문서에서는 ‘예조참판지장(禮曹參判之章)’과 같이 관직명에 ‘지장(之章)’을 더한 인문으로 바뀌었다. 관인은 모두 겉봉과 내지의 이름 부분에 답인하였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통문 관계가 무너지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 관계가 성립됨에 따라 국서에 사용할 어보 또한 바뀌게 되었다. 1881년(고종 18) 고종은 기존에 신사(信使)가 가지고 가는 국서에 이덕보를 쓰지 말고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를 제작하여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갑오개혁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 관련 국서에 사용하는 어보가 국새로 대체되었다. 갑오개혁을 즈음하여 조선에서는 대조선국보 외에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1882년 7월 1일 제작), 대군주보(大君主寶, 1882년 7월 1일 제작),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1876년 12월 15일 제작)를 제작하여 일본 관련 국서에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춘관지(春官志)』
  • 『교린지(交隣志)』
  • 『통문관지(通文館志)』
  • 류재춘, 「조선후기 조·일국서연구」, 『한일관계사연구』창간호, 1993.
  • 손승철, 「명·청교체기 대일외교문서의 연호와 간지」,『대동문화연구』32, 1997.
  • 이훈, 「조선후기 대일외교문서」, 『고문서연구』4, 1993.
  • 辛基 秀·仲尾 宏 편, 『善隣と友好の記錄 -大系 朝鮮通信使-』, 明石書店, 2001.
  • 『九州史學』132号, 九州史學硏究會,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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