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군 이강(義昌君 李玒)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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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의창군 이강 |
한글표제 | 의창군 이강 |
한자표제 | 義昌君 李玒 |
분야 | 왕족/왕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윤경수, 김구진 |
봉작 | 의창군(義昌君) |
시호 | 강도(剛悼) |
출신 | 양반, 왕족 |
성별 | 남자 |
출생 | 1428년(세종 10) |
사망 | 1460년(세조 6)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현)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산25-4 |
증조부 | 이자춘(李子春) |
조부 | 이성계(李成桂): 태조(太祖) |
부 | 이도(李*): 세종(世宗) |
모_외조 | 김신빈(金愼嬪): 청풍 김씨(淸風金氏), 김원(金元)의 딸 |
형제 | (형)이증(李璔): 계양군(桂陽君) (동생)이침(李琛): 밀성군(密城君) (동생)이관(李璭): 익현군(翼峴君) (동생)이당(李瑭): 영해군(寧海君) (동생)이거(李璖): 담양군(潭陽君) |
처_장인 | 연안 김씨(延安金氏): 김수(金修)의 딸 →(자녀)1남 2녀 |
자녀 | (1자)이호(李灝): 사산정(蛇山正), 영산군(榮山君), 사산군(蛇山君) (1녀)신우정(辛禹鼎)의 처 (2녀)신종호(申從濩)의 처: 신숙주(申叔舟)의 손주 며느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의창군 이강(義昌君 李玒) |
총론
[1428년(세종 10)~1460년(세조 6) = 33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서출 10남 2녀 중에서 제 3왕자. 봉작(封爵)은 의창군(義昌君)이고, 자는 현지(顯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김신빈(金愼嬪)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서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김원(金元)의 딸이다. 김신빈이 낳은 아들 6명 중에서 둘째인데, 동복형은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이고, 동복아우는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 익현군(翼峴君)이관(李璭), 영해군(寧海君)이당(李瑭), 담양군(潭陽君)이거(李璖)이다.
세종 시대 생활
1428년(세종 10) 세종과 김신빈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435년(세종17) 2월 8세 때 의창군에 봉해졌다. 1439년(세종 21) 3월 12세 때 세종이 친림하여 의창군의 배필을 간택하였는데, 12월 직장(直長)김수(金修)의 딸과 혼인하였다. 1449년(세종 31) 박휘겸(朴撝謙)의 청탁을 함부로 들어주었다고 하여 파직되었는데, 박휘겸은 의창군이강에게 청탁하여 내금위(內禁衛)의 사용(司勇) 벼슬을 속여서 받았으므로, 장형(杖刑) 1백 대와 도형(徒刑) 3년에 처해졌다.
단종~세종 시대 활동
1452년(단종 즉위) 세종이 승하한 직후, 어머니 김신빈이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으므로, 이때 의창군이강이 단종에게 하소연하여 어머니의 환속을 간청하였다. 단종이 김신빈에게 환속을 명하였으나, 김신빈은 단종의 어명(御名)을 따르지 않고, 불가에 귀의하였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왕자들과 종친들은 수양대군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나누어졌는데, 김신빈이 낳은 6형제들은 양혜빈이 낳은 3형제와 달리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을 지지하였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한 이후 각종 연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단종을 보호하거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벌받은 ‘역적’들의 가산과 노비를 적몰하였다가, 종친들과 공신에게 나누어 줄 때 의창군이강은 여러 차례 재산과 노비를 하사 받았다. 1456년(세조 2) 3월 문종의 부마 영양위(寧陽尉)정종(鄭悰)의 강화에 있는 집과 전지를 하사 받았고, 1457년(세조 3) 4월 최사우(崔斯友)와 성승(成勝)의 홍주(洪州)에 있는 전지를 하사 받았으며, 1457년(세조 3) 2월과 8월 2차례에 걸쳐 적몰한 ‘역적’들의 노비들을 하사 받았다. 이를 보면, 의창군이강은 그의 동복형 계양군이증을 따라서 세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456년(세조 2) 12월 세조의 명으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전구서(典廐署) 북쪽에 큰 종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다. 또 1457년(세조 3) 4월 명나라에 사신가는 내시부(內侍府)판사(判事)전균(田畇)을 홍제원(弘濟院)에서 전송할 때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 친형 계양군이증과 함께 참석하였다. 1460년(세조 6) 2월 27일 속병을 앓다가 졸하였는데, 향년이 33세였다.
성품과 일화
『세조실록』 「의창군 이공 졸기」에서, “성품은 청렴결백하고 의분강개(義憤慷慨)하였다.”고 하여,[『세조실록』세조 6년 2월 27일 「의창군 이공 졸기」] 성격이 재물을 탐내지 않고 세조의 왕권 강화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아버지 세종이 그를 칭찬하기를, “궁궐 밖에서 자라서 그 마음이 겸손하다”고 하였다.[『세종실록』세종 27년 7월 9일] 1463년(세조 9) 5월 4일 그의 동복아우 익현군이관이 졸하였을 때 세조가 한탄하기를, “이것은 모두 계양군의 허물이다. 의창군이 술로써 죽었는데, 익현군도 또한 술로써 죽으니 내가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김신빈이 낳은 계양군이증과 의창군이강과 익현군이관이 모두 과음하다가 술로 인한 속병을 앓아서, 모두 일찍 죽은 것을 알 수 있다.[『세조실록』세조 9년 5월 4일 「익현군 이관 졸기」]
묘소와 후손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에 있다.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통례문(通禮門) 부지사(副知事)김수(金修)의 딸인데, 1남 2녀를 낳았다. 1자는 사산군(蛇山君)이호(李灝)인데, 1462년(세조 8) 영산군(榮山君)으로 봉해졌다가, 1465년(세조 11) 사산군으로 개봉되었다. 장녀는 신우정(辛禹鼎)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인 신종호(申從濩)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용재총화(慵齋叢話)』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역사(海東繹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