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승(義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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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의병의 한 형태로 참전한 승려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조선후기에는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 등에 교대로 상번하던 지방 승군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임.

개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을 때, 의승은 의병의 한 형태로 참전하였다. 의승군은 초기 전투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곧이어 군량의 운송, 성곽의 축조 및 경비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의 사관(史官)은, ‘승군은 접전(接戰)에 능하지 않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역(力役)에 부지런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각 도에서 그들에게 의지하였다.’고 평가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전쟁 중에 의승군은 성곽을 지키는 수비 병력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억불론의 시각을 견지하였던 지배층 관료들도 승병 운영의 효율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전쟁 중은 물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의승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의승 상번(上番)의 군역제도를 수립하였다.

일찍이 세종대에 북변의 수졸 중 승군이 편제된 일이 있었고,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당시에는 전라도·충청도의 승군을 징발해서 성을 쌓고 배를 만들도록 한 일이 있었다(『명종실록』 10년 5월 18일).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임시로 편성된 승군이었을 뿐, 크게 군사력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전라우수영에서도 승군이 돌을 줍는 일에 동원된 적이 있었지만, 역역에 징발된 역승(役僧)이었을 뿐이다. 전라우수영 관할 아래 있던 인근 군현의 승군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에야 비로소 의승수군(義僧水軍)으로 편제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전쟁에 참여한 승군들은 식량을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위해서 둔전(屯田)을 경작하는 일이 많았다. 마침 병력과 군량을 동시에 조달해야 했던 관료들이 ‘군사와 농군을 분리[兵農分離]’하는 문제를 숙고하던 시기였으므로 승군을 전문적인 군사 집단으로 활용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의승제도가 확립된 것은 인조대의 일이었다. 인조 초, 남한산성을 축조한 뒤 승군을 이곳에 편제하였다. 17세기 이후 승역(僧役)은 강화되어 갔는데, 이 무렵 군역으로서의 승역이 제도화되었다. 의승역은 양인 농민의 군역에 비견되는 승도의 군역이었다. 군역이 동요하는 가운데, 양인 농민의 신역 중 일부가 의승역이라고 하는 변형된 형태로 승도에게 부과된 것이었다. 남한산성의 의승군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 훗날 평가되었다. 그 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조되었을 때 여기에도 의승을 상번하도록 하는 조치가 이어졌다. 1714년(숙종 40) 판부사이유(李濡)는 남·북한산성 모두에 의승을 두되, 외방의 사찰에서 ‘승도의 많고 적음[僧徒之殘盛]’을 헤아려 각 350명씩 정원을 배정한 뒤 윤번제로 입역(立役)할 것을 건의하여 실현시켰다(『숙종실록』 40년 9월 25일).

6도의 의승들은, 상번할 때마다 소속 사찰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경비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의승제는 의승 자신은 물론 외방의 사찰들이 피폐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8세기 중엽 영남 지방의 의승이 한 차례 상번하는 데에는 30냥의 경비가 든다고 하였다. 균역법 이후 양인 농민이 1명당 면포 1필의 군역세를 부담했던 것과 비교하면, 수십 배에 달하는 무거운 부담이 의승역의 명목으로 강요되고 있었다.

17세기 후반의 축성역에서는 승도를 불러들여 사찰을 짓는 ‘모승건찰(募僧建刹)’의 방식이 많이 채택되었다(『숙종실록』 8년 10월 8일). 정부에서는 승도를 모아 성을 수비하는 승영(僧營)으로 삼고, 이들에게 수리를 맡겨 경영하면 힘들이지 않고 역사를 마칠 수 있다고 보았다. 승도를 축성역에 동원할 뿐 아니라, 그대로 성을 지키는 병력으로 편제하려던 것이었다. 이에 모집한 승도를 승군으로 편성한 뒤, 잡역을 면제해 주고 경작지를 제공하는 등의 우대책을 썼다. 이와 같은 방식은 전국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널리 채택되었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이 성립된 이후 양역의 부담이 줄어든 것을 계기로 승역을 완화시키는 조치가 본격적으로 제시되기 시작하였다(『영조실록』 27년 6월 14일). 17세기 초부터 승역이 강화된 결과, 각지의 사찰은 점차 피폐하게 되었고 승역의 담당자인 승도는 생존을 위협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1756년(영조 32) 시행되었던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제도는 균역법 시행 직후 승역을 덜어 주어야 했던 정황을 반영한 결과였다(『영조실록』 31년 8월 14일). 이로써 전국 승도의 군역으로 부과되던 의승 상번의 역이 번전(番錢)의 대납이라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부역 노동이 현물 납세로 바뀌던 군역제의 변동 과정을 의승 군역에도 적용함으로써 그 부담을 사실상 크게 경감시켜 준 것이었다. 1785년(정조 9)에는 의승 번전의 납부액을 다시 절반으로 줄이는 조치가 취해졌다(『정조실록』 9년 2월 1일).

담당 직무

임진왜란 당시의 의승은, 전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군량 운송, 성곽 축조 및 경비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7세기 이후 성립된 남·북한산성의 의승군은 각 도에서 교대로 상번하여 복무 기간 중에 산성 각처의 군기(軍器) 및 화약고를 지키는 일을 맡았다.

변천

18세기 말엽 전국의 사찰은 승역의 부담이 점차 가중되면서 빠르게 피폐해졌다. 사찰이 붕괴하면서 승역이 해체되고, 결국 부담은 다시 농민에게로 돌아갈 상황에 이르렀다. 1750년 균역법이 시행된 이후 전국적으로 승도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양역의 부담이 반으로 줄었고, 그에 따라 승려의 신역이 오히려 양역보다 과중한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승역을 완화시킬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1756년의 의승방번전(義僧防番錢)제도는 승역 완화의 정책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이어서 1785년에는 의승이 납부하는 방번전의 납부액을 다시 절반으로 줄이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사찰의 승역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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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갑주, 『조선시대 사원경제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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