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관(陰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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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문음과 천거 등 음서제를 통하여 임용된 관료.

개설

음관(蔭官)은 문음(文蔭)·천거(薦擧)·특지(特旨) 등 과거제 이외의 모든 관료 임용제도에 의해서 임용된 관료였다. 조선시대의 관료는 문무과 출신의 문과·무관과 문음 등을 거쳐 출사(出仕)한 음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무 양반과 음관은 조선시대 권력 구조의 틀 속에서 정치를 운영해 온 지배 세력이었다. 음관을 선발하는 인사 제도는 문음과 천거로 대별되며, 이를 합쳐 음서제(蔭敍制)라 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관심을 끌어왔던 문음은 부조(父祖)의 공음(功蔭)에 따라 관리를 서용하는 인사 제도였다.

‘음(蔭)’은 사전적으로 ‘부조의 유훈(遺勳) 또는 문벌(門閥)의 여영(餘榮)에 의하여 특별 대우를 받는 일’을 의미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우 특별 대우는 대체로 문음취재(門蔭取才)와 종친음(宗親蔭)·공음을 통한 실직 등용, 대가(代加), 특수대위군(特殊侍衛軍)에의 입속(入屬), 천거에 의한 출사, 적장천(嫡長薦) 등을 말하였다. 이 가운데서(중에서) 품계를 받는다든가 체아직(遞兒職)을 받는 경우에는 음관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 실직으로 초입사(初入仕)하기 이전에 음을 통하여 가자(加資)되었거나 동정직(同正職)·체아직을 받았다고 해서 음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음관 초입사라 함은 음에 의하여 직사(職事)가 있는 동반직(東班職)에 임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따라서 음서 출신의 음관은 문무의 과거 출신과 출신상의 구별이 있었다.

음관은 조선초기부터 문과 합격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는데 음관의 초수관품(初授官品)과 초직(初職)으로서 권지직(權知職)을 받았다는 사실 등이 그 사례였다. 주로 성중관(成衆官) 입속과 권무직(權務職)·권지직 등의 입사가 주를 이루었으나 세조 연간에 이르러 초입사직이 참봉 중심제로 개편되면서 음관 초입사직의 정직화가 단행되었다.

음관은 시기에 따라 지위가 변화되었다. 특히 성종 연간에 대두하기 시작한 사림(士林)들이 구질서의 개혁을 도모하는 가운데 각 정치 세력이 이해관계에 따라 타협과 병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문무관과 대항하던 음관은 정치 구조의 핵심적 지위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음관의 청요직(淸要職) 진출 제한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림의 벌열화 및 세력 갈등의 심화와 더불어 음관의 정치적 역할이 중시되면서 음직과 음관수가 확대되었다. 이로써 조선 사회는 문벌을 더욱 중시하는 퇴행적인 관료제 사회로 변화되어 나갔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관료들의 출신을 입사 경로에 따라 철저히 구분하였다. 1414년(태종 14) 정월의 기사에 의하면, “제수계본(除授啓本)과 이문(移文)이 대내(大內)에서 나와 제수하는 자는 특지(特旨)라 칭하고, 단자(單子)로 계문하여 제수하는 자는 모인천(某人薦)이라 칭하며, 공신 및 2품 이상의 자서(子壻)는 모자서(某子壻)라 칭하고, 전함관안(前銜官案)에 붙인 자는 전함관안이라 칭한다.”고 하였을 정도로 조선초기 인사 행정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문무과 출신 외의 관료들의 출신을 밝혀 놓았다는 점이었다(『태종실록』 14년 1월 18일).

임금의 특별 명령이라든가 천거·문음·전함관안 등재 등 네 가지 임용제도에 의하여 등용된 관료들은 곧 음관을 가리켰으며 이들의 인적 사항은 정안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초입사 당시의 출신이 엄격히 구별됨으로써, 문무과 출신과는 다른 관료군인 음관이 문무반과 대등하면서도 차별적인 반열을 형성하게 되었다.

음관이라는 용어가 조선시대에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1441년(세종 23)의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류은지(柳殷之)의 졸기(卒記)에서, “음관(蔭官)으로 보(補)하여 여러 번 이병조정랑(吏兵曹正郞)으로 옮겼다”고 한데서 처음으로 그 용례가 나타났다(『세종실록』 23년 9월 12일). 그리고 오랫동안 보이지 않다가 명종대에 와서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로는 하나의 관료군으로 인식될 정도로 자주 거론되었다.

그러나 음관이라는 용어는 그 용례가 조선시대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으며 사실 음서제도가 시행되는 한 얼마든지 사용될 만한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음서조(蔭敍條)에도 음서제도와 관련하여 사용된 세 가지 예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앞의 세종조 기사 외에 인물지에도 그 용례가 나타나는데, 한계미(韓繼美)와 박치(朴緇)의 사례가 그것이었다.

명종대인 1551년(명종 6)에도 “문관과 무관 그리고 남행(南行)을 구별하지 말고”라 하거나, “혹은 음관이 될지라도 향방(向方)을 알 것이고”라 하고(『명종실록』 6년 11월 2일), “시임 수령(時任 守令)들은 모두 음관” 등과 같이 사용한 예가 있으며 1553년(명종 8)에도 “하물며 무인·음관을 귀하게 여기겠습니까?”라고 사용한 예가 있었다(『명종실록』 8년 10월 23일).

음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자료로는 1583년(선조 16), 성주(星州)에 사는 생원 하항(河沆)이 올린 상소를 들 수 있다. 하항은 이 상소에서 음관을 ‘선세의 훈공을 이어받고 가문의 공덕을 배경으로 벼슬하는 자’로 지칭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선조가 천거로 벼슬하는 자를 음관으로 배척한 데 대하여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를 변론하지 않은 이이(李珥)도 공격하였다.

이러한 논란에 대하여 사관(史官)은 “우리나라의 벼슬길에는 문·무·음의 세가지가 있으며 천거를 통하여 벼슬하는 자를 미출신인(未出身人)이라 하였다. 상(上)이 미출신인까지 합쳐 일반적으로 음관이라고 일컬은 적은 있지만, 이이 등은 함께 포함시켜 일컬은 적이 없었다”고 평하였다. 이는 당시의 벼슬길이 문무가 아닌 문·무·음의 세 갈래가 있었고 이 중 음관에는 천거 출신인 미출신인도 포함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항의 상소는 곧 음관과 유일(遺逸)을 차별화하려는 사림들의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유일은 조선건국 직후 도평의사사에서 건의하여 채택된 천거제도에서 밝힌 천목(薦目) 가운데 ‘경학에 밝고 행실을 수양하며 도덕을 겸비하여 가히 사범이 될 만한 자’를 가리켰다. 따라서 사림정치가 시작된 성종 연간부터 사림들은 스스로 저질의 관료로 천시해 온 음관을 자신들의 분신인 유일과 동렬에 위치 지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산림(山林)들이 스스로 음관이라 자처하는 데서도 음관으로서의 유일은 관료적 한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다음의 기사는 천거 출신이면 누구나 곧 음직자였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 신흠(申欽)은 “우리나라에는 사람을 취하는 길이 세 가지가 있는데, 문과와 무과, 음직이다. …… 음직은 보거취재(保擧取才)하고 공천이선(公薦里選)한 후에 주의(注擬)를 허락하니, 대개 2백년은 바뀌지 않았다.”고 하였다. 신흠이 취인지로(取人之路)를 설명하는 가운데, 문무과 외의 음직은 보거취재인 문음과 공천이선인 천거제도를 가리킨다고 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 삼과(三科)에 의한 취인의 역사가 200년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조선건국 이래로 문과와 무과·음직 이 세 갈래의 입사로가 운영되어 왔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음관이라 지칭할 때의 그들은 음서 출신으로 직사가 있는 동반직에 등용된 자들이었다. 직사가 있는 동반직은 무록관(無祿官), 권무직·권지직, 성중관, 겸관직(兼官職) 등을 포함하였다. 음관으로 초입사하기 이전에 음을 통하여 가자되었다고 해서 음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충순위(忠順衛)의 입속도 음관으로의 입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체아직도 음관의 초입사직에서 제외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세조 연간에 관제를 개편하여 권무직·권지직이 혁파되고 참봉·봉사 등으로 정직화가 단행되면서 ‘음’ 출신에 대한 현실적인 처우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별좌류 등의 무록관은 참하직의 신설 등으로 확대 존속되었다. 별좌류는 무록관으로서 조선초기부터 음자제의 초입사직으로 활용되었으며, 찰방은 봉명사신(奉命使臣)의 기능에서 역참 관리 직임으로 일원화되면서 세조 초에 음직화하였다. 1457년(세조 3)에 신설된 선전관(宣傳官)도 음자제의 입속을 허용하였으나, 서반직(西班職)으로서 음관으로는 분류되지 않았다.

조선초기의 문음제도는 승음자(承蔭者)들에게 주는 초직에 대하여 품계만을 명시하였을 뿐 초직의 종류 등은 논의되지 않았다. 조선초기의 음직자들은 진신자제(搢紳子弟)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승진과 천전에 일정한 제재를 가하려는 논의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문음제도는 문과 합격자와 동등한 대우로 초입사의 권리를 부여하였다. 문음 출신자에게 제수되는 관품은 문과례(文科例)를 기준으로 하였던 것이다.

1413년(태종 13) 7월 사간원의 상소 내용을 보면, 18세 된 문음 자제는 예문관에서 실시하는 취재 시험에서 일경(一經)만 통해도 문과례에 따라 패(牌)를 지급하고 벼슬살이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였다. 이를 『경제육전(經濟六典)』의 규정을 통하여 문과 합격자의 초수관품과 비교해 보면, 문음 출신자에 대한 대우가 문과 합격자와 동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수관품 뿐만 아니라 문과 을·병과 합격자의 권지분관(權知分館) 역시 문음 출신자의 권지입사와 같았다. 다만 양자의 차이는 음서 출신이 각 관서에 분산 입속되었던 데 반하여, 후자는 성균관·승문원·교서관 삼관(三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삼관권지에 대한 인식은 사실 음서 출신자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세종 연간에 ‘각사의 남항이 된 자가 밝히 이사(吏事)를 익히는데, 삼관권지가 수년 동안 한쪽 모퉁이에 엄체되어 세무(世務)를 알지 못한다’거나 ‘삼관권지를 각사의 남항에 쓰라’고 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음관이 이사나 세무에 밝은 전문 행정 관료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한 상태에 있었음을 반영하는 한편, 출신이 다른 문관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로서의 지위와 비중도 그에 못지않았을 것임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당쟁이 치열해지자, 광해 연간의 대북정권이나 인조반정 공신들은 정국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자 인사권을 천단하면서 음관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인조는 반정으로 대두한 훈무세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무관의 천대를 비판하면서 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귀(李貴) 등은 무변보다 공신 자제인 음관을 중용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와 함께 집권과 정책 결정에 명분을 제공하는 산림의 대두로 음관의 지위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산림을 위한 독자적인 인사 구조를 갖추는가 하면, 남대(南臺)나 이조 당상직에도 진출을 용인하였다.

허목(許穆)은 음관에게 허락되지 않는 기로소의 입속 특전까지도 누렸다. 그러나 산림은 어디까지나 음관으로서, 산림 스스로 음관을 자처하거나 상대 당파로부터 음관이라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정국의 핵심 인물들의 자제들은 정치적 힘의 근원에 따라 대간의 제재를 당하던 이조 판서나 각도 관찰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음관의 성장은 초입사직의 확대를 가져왔다. 1633년(인조 11) 최명길(崔鳴吉)의 관제 개편 내용에 의하면, 음관 초입사자 수는 경외의 참봉 70명, 금부도사 10명, 별좌 29명, 선공감역 6명, 동몽교관 4명, 내시교관 2명, 수운판관 2명, 찰방 27명 등이었다(『인조실록』 11년 7월 12일). 1523년(중종 18)에 지적된 4개의 관직에서 크게 늘어난 숫자였다. 음관 초입사직의 증가는 문관의 인사가 적체되는 역현상을 야기하여 관제 개편이 단행되었다. 또한 무인의 출사로를 확대하기 위하여 음관의 입사 연령을 생원·진사는 30세, 유학은 40세로 제한하는 한년입사법(限年入仕法)도 제정되었다. 한편 음관 초입사자 수의 확대는 음관 자신들의 승진상의 적체도 야기하여 숙종대에는 여러 차례에 걸친 관제 개편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탕평정치기인 영·정조대는 남인의 몰락에 따른 경향의 학계분기와 경화사족의 대두로 경향간의 차별이 두드러졌다. 영조는 탕평책을 구현하기 위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인재 등용과 서울 거주의 벌열에 관심을 두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천명한 인사 원칙 가운데 문·음·무를 공정히 등용한다는 점과 대현 등의 자손을 등용토록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인사의 정책은 벌열을 배경으로 한 음관의 성장을 가속화하였다. 공신·청백리·선현·유현·전망자·원사인 등의 적장손 등용 정책인 적장천이 활성화되었다. 초사조용과 적장천은 음관의 가세를 유지시켜 주는 세신 우대 정책이었다. 이 정책의 이면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따라서 음관의 당론에 따른 정치 참여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음관에게 제한되었던 일부 주요 당상관직도 서서히 개방되었다. 관찰사나 곤수(閫帥)에 임명되기도 하였고, 1796년(정조 20)에는 이성보(李城輔)가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정조실록』 20년 6월 14일), 경연 특진관·도승지·보국숭록대부 등도 허용되었다. 『해동관품록』에 의하면 음관이 진출할 수 있는 관부는 의금부, 중추부, 돈녕부, 호·형·공 삼조, 한성부·도총부·승정원, 오위장청 등이었으며 최고위직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유일에게는 의정부·이조·사헌부 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도 허용하였다. 정종4품과 정5품의 관직은 정랑직 외에 대부분 문관직인 청요직이었는데, 유일은 그중 일부 관직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음관은 종친부의 정4품인 전첨(典籤)·정5품인 전부(典簿)로도 진출할 수 있었다. 종5품의 경우 판관(判官)과 능(陵)·전(殿)·부(府)·서(署)의 영(令)에 음 대신 생진(生進)으로 표기하여 음직임을 나타내었으며 판관과 영에서 정5품의 호·형·공 정랑직으로 천전하였다가 지방직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리고 6품 이하의 관직은 출신에 구애 없이 진출할 수 있었으나, 대체로 음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던 경리청·선혜청·장용영낭청에도 음관이 배치되어 그들의 정치적 역할과 성격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임진왜란 이래로 계속된 문·음관의 적체로 정조대에 이르러 여러 변통책을 동원하여 이를 해소시켜 보고자 하였으나 인사의 적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정조가 문관의 질적 저하와 자질 부족을 탓하며 음관을 중시하기도 함에 따라 음관의 관직 분포 범위는 확장되는 추세였다.

지방 수령직은 교차과가 단일화하면서 음과(蔭窠)가 크게 증가하였다. 1788년(정조 12)의 지방관 현황을 보면 팔도 각 읍의 수령 자리가 모두 332개였는데 그중 무과가 90과, 음과가 179과였던데 비하여 문과는 43과에 불과하였고 문무교차과까지 합치더라도 문과는 70과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를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통하여 당시의 현황과 비교하면 음과는 103개에서 179개로 무려 70%라는 큰 증가율을 보였고 무과도 56개에서 90개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문과는 30개에서 43개로 증가하는데 그쳐 음과와 무과의 증가율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처럼 삼반의 수령직이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교차직이 감소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육안(百六案)』과 비교해 보면, 『여지도서』상의 교차과 140개가 23개로 축소 정리되어 거의 일원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조 연간 이래 어느 한 출신으로 단일화되는 수령직의 삼반 관직 체제를 갖추어 갔다.

의의

임진왜란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림들은 스스로 문벌화되어 갔다. 문벌은 곧 혈연을 매개로 한 관직 승계가 관행화됨으로써 형성되는 가문 중심의 비조직 체계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에 의한 종법제도의 정착으로 사상적 기반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음관의 임용은 이미 문벌화된 지배층의 자제들과 집권당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자파 인물의 전유물이 되었다. 혈통과 집권 정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음관의 정치적 위상은 당쟁이 계속 될수록 상승할 수밖에 없었으며, 가문이나 집권 정치 세력의 성쇠와 음관의 정치적·관료적 위상과의 관계는 음관의 속성상 정치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음관의 성장은 관료제의 변칙적 운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공개경쟁인 과거 시험 출신들이 우대되지 못하고 가문을 배경으로 형성된 벌열에게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인사의 경색과 관료제의 침체를 야기하였다. 이와 같이 음관이 집권층의 안정적인 정권 유지를 위하여 기능하는 한 당시로서는 관료제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다.

참고문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