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관(律官)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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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율관 |
한글표제 | 율관 |
한자표제 | 律官 |
동의어 | 율원(律員), 율자(律者) |
관련어 | 율과(律科), 율학(律學), 형조(刑曹), 율학청(律學廳), 사율원(司律院) |
분야 | 사회/사회구성원/중인 |
유형 | 직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남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율관(律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세종실록』 15년 1월 5일 |
조선시대 율령(律令) 등 법률에 대한 일을 전담하던 잡직 관원.
개설
조선시대 율학(律學)은 6학, 10학의 일부로 설치되었다. 율학을 관장하는 관청은 형조(刑曹) 율학청이다. 형조에는 판서(정2품), 참판(종2품), 참의(정3품), 정랑(정5품), 좌랑(정6품) 등과 율관직으로 종6품 율학교수·별제, 종7품 명률, 종8품 심률, 정9품 율학훈도, 종9품 검률 등의 이중적인 관직 체계를 두었다. 율관(律官)은 법률의 조율(照律)을 담당했으며,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실제 판결은 왕이나 문신 관료에 의해 이루어졌다.
내용 및 특징
율관을 가리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율자(律者)·율원(律員)·율학(律學) 등으로 칭하고 있다. 율관은 법률을 담당했는데, 율관의 판단에 따라 형률이 달라지기 때문에 율관의 업무는 사람의 신상과 관련된 중요한 직무였다.
1393년(태조 2) 율학은 6학의 하나로 설치되었다(『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1433년(세종 15)에는 형조 안에 있던 율학청을 위해 별도의 청사를 마련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5년 1월 5일).
율학청에 관한 직제는 『경국대전』에 성문화되었다. 율학교수(종6품) 1명, 별제(종6품) 2명, 명률(종7품) 1명, 심률(종8품) 2명, 율학훈도(정9품) 1명, 검률(종9품) 2명과 각 지방에 검률 각 1명씩을 두었다. 팔도에 파견된 검률은 감영(監營)에 소속되어 각 지방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조사하여 안율(按律)하여 과죄(科罪)하는 임무를 맡았다.
율학 교육은 중앙의 경우 형조에서, 그리고 지방의 경우 지방 관서에서 실시하였다. 형조에는 40명의 율학생도를 두었고, 지방의 경우에는 율학생도를 부에 16명, 대도호부와 목에 각 14명, 도호부에 12명, 군에 10명, 현에 8명씩을 두었다. 율학 교육은 율학교수와 훈도가 담당하였으며, 원활한 교육을 위해 지방과 서울과의 유기적인 운영 방식을 도입하였다. 주·부·군·현에서 율학생도 가운데 총민한 자를 천거하여 형조에서 배우도록 하고, 율학에 정통하면 돌려보내 그 배운 바를 널리 전파하도록 한 것이다.
율과 시험은 문·무과와는 달리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3년마다 시행되는 식년시와 증광시·대증광시가 있을 뿐이었다. 선발 인원은 초시 18명, 복시 9명이었다. 합격자는 형조의 권지(權知)로 배속되었는데,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계를, 3등은 종9품계를 받았다. 이미 품계를 가진 합격자에게는 1계를 더 올려 주고, 올린 품계가 응당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은 경우에는 거기서 1계를 더 올려 주었다. 율관들도 율과 시험에 응시했는데 그것은 가계(加階)를 위해서였다.
율학교수, 별제, 훈도는 각기 율학을 본업(本業)으로 삼는 사람을 뽑아 임명하였다. 국가에서는 실무에 밝은 사람이 기술직을 맡아서 원활하게 운영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율과 출신자를 우대하였다.
율관은 초기에는 양가 자제나 향리의 자제 등으로 충원되기도 했지만, 점차 기술 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관리나 그들의 자손에 의해 충원되었다.
명률 이하 심률·훈도·검률은 체아직으로 취재(取才)를 통해 1년에 2회 선발하였으며, 양도목(兩都目)으로 6월과 12월에 그 성적에 따라 승진 또는 출척(黜陟)시키도록 하였다. 근무일 수 514일이 차면 품계를 올려 주되, 율관은 종6품이 되면 그 직에서 떠나야 하였다. 율관은 기본적으로 한품거관제(限品去官制)에 의해 관로가 제한되어 있어 계속적인 승진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 직에서 계속 근무하기를 원하는 자는 그 때부터 근무한 날짜가 900일이 다시 차면 품계를 올려 주되 정3품 당하관에서 그치고, 아직 거관하지 않은 자들과 참상(參上)·참하(參下) 가운데 재능을 시험하여 체아직을 주었다.
따라서 율관은 6품에서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들에게는 취재(取才)에 응하거나 계속 근무하거나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계속 근무하더라도 다시 3품이 되면 물러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어 그 위의 품계로 승진할 수는 없었다. 취재 시에 차점을 차지한 자는 지방관으로 보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이남희, 『조선 후기 잡과 중인 연구: 잡과 입격자와 그들의 가계 분석』, 이회문화사, 1999.
- 이남희, 「조선 전기의 율관: 그 사회적 성격과 위상을 중심으로」, 『한국학보』15, 2003.
- 이남희, 「조선 후기 잡과 교육의 변화와 특성: 잡학 생도와 교재를 중심으로」,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13-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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