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이초지옥(尹彛李初之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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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 황제에게 이성계와 공양왕을 무고한 일로 벌어진 옥사.

개설

고려의 우왕·창왕을 폐한 이성계는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공양왕은 이성계의 인친(姻親)이었다. 공양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나라에 갔던 조반(趙胖)은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무고(誣告)한 내용을 듣게 되었다. 윤이·이초는 이성계가 공양왕과 함께 명나라를 침범하려 하므로 우현보(禹玄寶)·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 고려를 토벌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조반은 윤이·이초의 무고를 명나라 황제에게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어 주었고 1390년 5월 고려에 돌아온 뒤 윤이·이초의 무고 내용을 보고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이성계의 반대편에는 고려 구신(舊臣)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공양왕은 우현보 등 관련자들을 유배하는 선에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사직하였고, 정몽주(鄭夢周)가 뒤를 이어 수시중이 되었다.

이후 공양왕은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고려 구신을 유배시킨 배후로 이성계를 지목하고 그를 압박하였다. 더 나아가 공양왕은 정몽주와 연합하여 1391년 해주에서 이성계가 낙마한 것을 기회로 삼아 이성계 일파를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이 전면에 나서 정몽주를 살해하면서, 공양왕의 정치적 위상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역사적 배경

1388년(고려 창왕 즉위) 11월에 김저(金佇) 등을 동원한 우왕의 두 번째 이성계 살해 계획이 실패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흥국사(興國寺)에서 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趙浚)·박위(朴威)·정도전 등과 함께 회동하여 폐가입진(廢假立眞), 곧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울 것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신왕(神王)의 7대 손인 정창군(定昌君)왕요(王瑤)를 공양왕으로 옹립하기에 이르렀다[『태조실록』 총서 100번째기사]. 당시에 공양왕의 아우인 왕우(王瑀)의 딸과 이성계의 7남 이방번(李芳蕃)이 혼인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성계가 인친인 공양왕을 정치적으로 선택하였다는 풍설이 있었다(『태조실록』 6년 2월 24일). 공양왕이 즉위한 후 정국은 9공신 체제로 운영되었고, 1389년 정국에서 수시중(守侍中)인 이성계는 그 핵심에 있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한 것과 다름없었다.

발단

1390년 5월에 황제가 거처하던 경사(京師)에서 돌아온 순안군(順安君)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조반이 파평군(坡平君)윤이와 중랑장(中郞將)이초의 무고를 보고했다. 윤이와 이초는, 인친 왕요를 왕으로 세운 이성계가 명나라 침범을 반대한 이색(李穡)·조민수·변안렬(邊安烈)·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 등을 잡아서 살해하려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공양왕의 사위인 우성범(禹成範)의 조부 우현보·우인렬(禹仁烈)·정지(鄭地)·김종연 등을 먼 곳으로 귀양 보냈지만, 이색·우현보 등이 자신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려를 토벌해 줄 것을 청하였다고 예부(禮部)에서 들은 사실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였다[『태조실록』 총서 111번째기사]. 이는 이성계가 공양왕을 정치적으로 선택하였다는 풍설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 내용이 이성계를 직접 겨냥하였고, 그 대척점에 고려 구신들이 대거 가담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대단히 큰 폭발력을 가진 사건이었다. 조반은 당시 윤이·이초의 무고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여 명나라에서 무고 사건으로 처리되게 하였다(『태종실록』 1년 10월 27일).

경과

왕방과 조반의 보고를 들은 공양왕은 우현보 등 11명을 하옥하고, 이색·우인렬 등 9명을 유배하였다[『태조실록』 총서 111번째기사]. 시간이 지나면서 공양왕은 유배·처벌된 고려 구신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려 하였다. 여기에 이 사건의 핵심 인물로 도피하였다가 체포된 김종연이 심덕부 휘하와 공모(共謀)하여 이성계를 살해하려 하였다고 자백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심덕부·지용기 등이 유배되었고, 9공신 체제가 붕괴되었다. 또한 이성계는 수시중에서 사직하여 영삼사사(領三司事)로 물러난 반면 공양왕은 정몽주를 수시중에 임명하였다. 이는 즉위 초에 이성계에게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하면서 도움을 청한 공양왕의 태도와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것이었다. 정도전이 윤이·이초의 옥사에 대한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는 그 옥사를 중지시킨 것에서 이 사건에 대한 대립된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태조실록』 7년 8월 26일). ‘윤이·이초의 옥’을 기점으로 이제까지 유지되던 이성계와 정몽주의 동반자 관계가 깨지고 정적(政敵)으로 대치하게 된다.

1391년에 공양왕은 태조를 중외의 군사(軍事)를 통솔하는 도총제사(都摠制使)에 제수하면서도, 우현보 등의 귀양을 청한 대간의 배후로 이성계를 지목하였다. 이성계의 반발에도 그를 대간의 배후 인물로 확정하고, 판문하부사로 제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색을 불러들여 사실상 구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또한 정몽주는 이성계가 1392년 3월에 해주에서 사냥하다 낙마한 것을 기회로 삼아 조준·정도전 등을 유배하여 이성계의 최측근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방원이 전면에 나서 정몽주를 제거하면서 상황은 이성계 일파에게 유리하게 급반전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이상백, 『한국 문화사 연구 논고』, 을유문화사, 1954.
  • 조계찬, 「조선건국과 윤이·이초사건」, 『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 1987.
  • 이상백, 「삼봉 인물고 (1): 무인난설원기(戊寅難雪寃記)를 중심으로」, 『진단학보』2, 1935.
  • 이상백, 「삼봉 인물고(완): 무인난설원기(戊寅難雪寃記)를 중심으로」, 『진단학보』3, 1935.
  • 한춘순,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 난’의 재검토」, 『조선시대사학보』55,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