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량관복(六梁冠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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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의 조하복(朝賀服)으로 착용한 관복.

개설

왕세자의 관복이다. 1428년(세종 10) 중국에서 하사한 왕세자의 조하복으로 육량관(六梁冠)에 옥대(玉帶), 폐슬(蔽膝), 패옥(佩玉)을 더하였다. 1494년(성종 25) 왕세자의 조복이 칠량원유관(七梁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입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칠량관 이상은 특별히 원유관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육량관복은 왕세자의 조복이다. 1408년(태종 8) 왕세자의 조복으로 오량관(五梁冠)·적라의(赤羅衣)·백사중단(白紗中單)·적라상(赤羅裳)·폐슬·혁대(革帶)·패(佩)·수(綬)·백말(白襪)·흑리(黑履)·상홀(象笏)을 중국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이에 판부사(判府事)변계량(卞季良)은 왕세자의 양관이 배신과 분변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여(『세종실록』 9년 10월 19일), 양관 등수를 올려서 내려줄 것을 청했다(『세종실록』 10년 7월 3일). 이에 1428년(세종 10) 왕세자의 관복으로 육량관 1정을 내려주었다(『세종실록』 10년 12월 7일).

그러나 왕세자가 입은 육량관복은 정조(正朝)와 동지(冬至) 때 백관들이 입는 조복과 다를 바가 없다는 논의가 있어 1493년(성종 24)에 왕세자의 칠량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면 옛 제도에도 부합하고 현실에도 마땅하다고 했다(『성종실록』 24년 3월 14일). 결국 세자의 관복은 육량관에 옥대를 띠고 폐슬과 패옥을 더하므로 백관과 차이가 있었으며, 1450년(세종 32)에 면복을 흠사한 이후로는 육량관복을 하삭망(賀朔望)에 쓰도록 했다(『성종실록』 19년 2월 21일). 이후 ‘관복을 갖춘다’고 하는 것은 육량관에 강사포를 입는 것으로 바뀌었다(『성종실록』 25년 2월 7일). 이후 육량관복은 칠량관복으로 바뀌고 명칭도 원유관으로 바뀌었다(『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는 왕세자의 원유관이 칠량에서 팔량으로 바뀌었다.

형태

육량관복은 육량관과 관복이다. 육량관은 백관의 오량관과 비교해 양의 수에 차등이 있어 6줄로 되어 있다. 관복은 조복인데 여기에 옥대와 폐슬, 패옥을 한다. 육량관에서 칠량관이나 팔량관으로 바뀌면 관복은 강사포가 된다.

용도

육량관복은 왕세자에게 면복을 내려주기 전에 착용하던 관복이다. 정지, 삭망 등의 조하(朝賀)에 입었는데 면복을 흠사받은 1450년 이후에는 하삭망에 입었다. 그러나 칠량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하기 시작한 성종 대에는 육량관복이 원유관 강사포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