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儒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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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이 연명(連名)하여 올리던 상소.

개설

유소는 성균관 유생들이 현안사나 유학과 관련된 중대사 등을 논의하고 그 결과를 밀봉하여 왕에게 올린 의견서이다. 그러므로 논의 단계에서부터 여러 집사(執事)를 차출하여 신중하게 진행하였고, 혹 사학(四學)의 유생과 연대할 필요가 있을 경우는 기재생(寄齋生), 즉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을 사학에 보내어 사유를 설명하고 의견을 취합하는 등의 절차를 거쳐 진행하였다.

내용 및 특징

성균관 유생들은 유교적 가치와 문화를 위협하는 사건이나 사람을 성토할 일이 있으면 장의(掌議)나 기숙사 여러 유생의 발론(發論)으로 소를 올린다. 혹 공론과는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중에 따라 유벌(儒罰)을 주거나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이미 소가 완성되면 모여 소두(疏頭)·소색(疏色)·제소(製疏)·사소(寫疏) 등 여러 소임(所任)을 차출하였는데, 이것을 대의사(大議事)라고 하였다.

먼저 소두를 뽑고 가장 나이 어린 재생인 조사(曹司)가 가서 자리로 나아가기를 청하였다. 소두가 가장 윗자리에 앉으면 조사는 장의가 부르는 대로 대의사기(大議事記)를 썼다. 첫머리에 소두의 성명을 쓰고, 그다음에 소색 두세 사람의 이름을 쓰니, 모두가 신중하게 선별한 사람들이었다. 그다음에 상소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성명을 쓰고, 끝에는 어느 날 봉장(封章) 한다고 썼다. 이후 하재(下齋)의 장의를 불러 뜰에 서게 하여 대의사기 기록을 전해 주었다. 그러고 나면 방외의 유생들이 다투어 소청(疏廳)에 명단을 보내 참여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상소 아래 유생들의 성명을 이어 쓰고 사인까지 하면 종이가 이어진 것이 200~300장에 이르렀다. 기록을 마치면 봉해서 함에 담아 보자기로 쌌다. 이것을 반인(泮人)이 명륜당으로 들고 나가는데, 유생들이 먼저 와서 계단 아래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다음에 상소를 읽을 사람으로 뽑힌 유생이 계단에 나아가 상을 펴 놓고 읽었다.

온갖 심부름은 아방사령(亞房使令)에게 일임하여 출발 즈음에 먼저 길 청소를 하게 했다. 한성부 오부(五部) 중 해당되는 부의 하인들이 길 근방의 주민들을 독려하여 물 뿌리고 쓰레기를 치우도록 하는데,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실시되었다고 한다.

유소의 행차, 즉 소행(疏行)이 출발하면, 시장 사람들은 장사를 그만두고 가게 문을 닫았다. 유소의 행차가 궐문에 당도하면 정문 앞에 있는 붉은 탁자 위에 소함을 놓고 모둠을 지어 앉는데, 사학의 유생들은 뒷자리에 앉았다. 대 아래 앞에는 네 개의 성균관 유생 명부인 청금록(靑衿錄) 상자를 벌려 놓았다. 그러면 수복이 먼저 들어가서 승정원에 알렸다.

소반(疏班) 근처에서는 비록 대신일지라도 감히 말을 탈 수 없었다. 그것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아방사령이 불러서 금지시켰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 하인을 잡아다 몽둥이찜질을 했다.

유소가 들어갈 때는 정문에서 왕이 거둥하는 길로 가고, 소두는 곁문으로 따라 들어가 승정원에 올리고 나왔다. 유소를 바치고 왕의 비답(批答)을 받기 전까지 성균관 유생들은 멀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궁문 밖 좌우에 세운 홍마목(紅馬木) 근처에 천막을 여럿 설치하고, 관아나 촌사에 식당을 설치하여 각각 천막에서 식사를 받았다. 이때도 성균관 식당에서 식사했는지 확인하는 명부인 도기(到記)에 서명하였다.

왕의 비답이 내려오면 읽을 사람을 정하고, 성균관 유생들은 조용하게 꿇어앉아 들었다. 읽기가 끝나면 함께 사배(四拜)를 올리고 물러 나왔다. 현직 관원이 유소의 비판 대상이 되면 왕에게 체직(遞職)을 청하는 것이 관례였다[『선조실록』 22년 11월 3일].

변천

유소는 조선전기부터 행해졌지만 선조 이후에 그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참고문헌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
  • 김동욱, 「이조 학교 풍속고-성균관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논문집』3, 1958.
  • 이원호, 「조선조 성균관 유생의 疏集(團體學)에 관한 연구」, 『교육학연구』8권 2호,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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