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流民)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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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유민 |
한글표제 | 유민 |
한자표제 | 流民 |
동의어 | 유망민(流亡民) |
분야 | 사회/향촌/취락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전국 |
시대 | 전근대 |
왕대 | 전근대 |
집필자 | 이규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유민(流民)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6년 2월 2일, 『세종실록』 19년 3월 26일 |
자신들의 근거지를 자의적으로 이탈하여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백성.
개설
전근대 사회에서 유민(流民)은 통시대적인 현상이다. 다만 발생 배경과 성격은 물론 존재 양태와 정부의 대책도 시대별로 특성을 가지며 유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은 수령의 직무이기도 하였다(『세조실록』 6년 2월 2일).
백성의 유망 현상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토착민의 열악한 생활 환경이 전제가 된다. 국가 권력과 지배층의 과도한 부세와 무절제한 수탈이 있던 시기에 유민이 집중되며, 유민은 그 자체로 개별적·소극적이나마 피역(避役)을 통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유민들의 유랑 이후 행로는 아사(餓死) 지경에 빠지거나 거지·빈민·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조직화되는 경우 민심의 소요와 사회 불안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유민 대책을 세웠으며, 이 점에서 유민은 잠재력을 가진 사회 부동 세력으로서 위상을 가진다.
내용 및 특징
전근대 사회에서 유민 발생의 배경은 시대별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사회 변동 과정에서 가속화된 농민층의 몰락과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 자연재해 등이 그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농업사회에서 소수 부농층에게 토지 소유가 집중되면서 소농민층은 경작지를 상실해 갔고, 조선후기에는 가뭄·수해·질병 같은 자연재해에 삼정(三政)의 문란과 같은 무절제한 수탈이 더해져 농민들은 더욱 유망하게 되었다. 특히 유망자의 조세 부담 몫은 공동 납부를 전제로 인징(隣徵)·족징(族徵)과 같이 주변 이웃이나 친족에게 부과되면서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농민층마저도 몰락하여 유망으로 내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순조실록』 11월 3월 30일 2번째기사].
유망한 농민들은 상업·수공업·광산업 등의 고용 노동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상업과 수공업 분야에서도 필요 이상의 노동력이 유입되면서 유민들이 고용 기회를 얻거나 자립적 기반을 확보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광산업에 유입된 농민들 역시 광산업의 불안정성, 정부의 광산 억압 정책, 중간 관리층의 수탈 등으로 자립적 기반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에 유민들은 다시 농촌 사회로 들어가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각종 부담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결국 타지의 농촌에서 협호(夾戶)와 고공(雇工)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정착할 길을 찾지 못하면 또 다시 유리하여 유민은 점차 부동·불안정한 사회 세력이 되어 갔다.
변천
조선전기의 유민 발생 배경에는 자연재해와 수령의 학정(虐政), 사신(使臣) 접대의 폐해, 축성역(築城役)·부방(赴防)·입보(入保)의 폐단 등이 주목된다. 이 시기 유민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다시 농촌으로 귀속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세종실록』 19년 3월 26일).
조선후기 유민 발생의 배경으로는 농업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한 농민층의 분화, 상품 화폐 경제의 향촌 사회 침투에 따른 소농·빈민층의 몰락과 지주 전호제의 모순, 국가 권력의 대민수탈과 자연재해 등을 들 수 있다.
조선후기 사회의 유민들은 빈민의 진휼이 상대적으로 활발하고 임노동자의 일자리가 마련되어 있던 도시와 서울, 상업·수공업·광산업이 발달한 지역, 화전 지역·도서 지역·북쪽 국경 지역과 같이 수탈이 덜 미치는 곳으로 유입되는 특징을 보였다. 또한 이 시기 들어서 유민들은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이들은 피역(避役)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농토에 매이지 않고 유리되어 갔다.
이러한 양상은 19세기 후반으로 이어지면서 심화되어 갔다. 정부의 유민 대책은 농민을 농토에 묶어 두기 위해 조세 수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에서 조세를 감면하여 유민의 귀향을 유도하는 미봉책에 그쳤을 뿐 구조적 개혁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유민들은 집단을 형성하여 도적의 소굴로 유입되거나 무장하여 명화적(明火賊)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그 자체로 정부 통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나아가 이로부터 농민 저항·민중 봉기의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참고문헌
- 변주승, 「19세기 유민의 실태와 그 성격 : 부유집단(浮游集團)을 중심으로」, 『사총』40·41, 1992.
- 변주승, 「18세기 유민의 실태와 그 성격」, 『전주사학』3, 1995.
- 신정희, 「조선 전기의 유민 문제」, 『역사교육논집』2, 1981.
- 정형지, 「19세기 전반 유민에 관한 연구」, 『국사관논총』72,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