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游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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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자들이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잡히면서 거리를 돌며 좌주(座主)·친척 등을 찾아보는 일.

개설

유가(遊街)는 과경(科慶), 즉 과거 급제를 축하하는 경사의 하나이다. 말을 탄 과거급제자를 천동(天童)이 앞에서 인도하고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며 광대가 춤을 추고 재인이 재주를 부리면서 거리를 돌며 좌주·선진자(先進者)·친척 등을 찾아보는 풍습이다. 그리고 문희연(聞喜宴)이라 하여 각각 자기 집에서 친척과 친지를 초대하여 성대한 자축연을 열었다.

유가의 행사는 대개 방방(放榜), 즉 입격자 발표가 있은 후 시작되어 사흘 동안 진행되었다. 이를 삼일유가라고 한다. 급제자가 찾아뵙는 좌주는 고려 때 쓰던 말로 시관(試官), 즉 시험관을 이르는 말이다. 급제자는 좌주에게 평생 문생(門生)의 예를 다하였으므로 은문(恩門)이라고도 했다.

연원 및 변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급제하면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 안을 돌며 놀게 하여 영관(榮觀)을 삼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조선에 들어와서도 유가 행사로 이어진 것이다.

1447년(세종 29)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생원 200명을 뽑는데, 그 등급 차례의 수효는 마땅히 전의 정원보다 배로 하여 1등은 10명, 2등은 50명, 3등은 100명으로 해야 될 것이며, 또 왕후의 기년(期年) 안에 해당되므로 유가하면서 경하하는 일을 정지하소서.”라고 건의하니 왕이 따랐다(『세종실록』 29년 2월 9일).

유가 방식은 한 때 문과와 무과가 서로 달랐다. 무과는 이전에는 없었던 것을 태종 때에 비로소 설치하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처음에는 문·무과의 차별이 없어 방을 게시하던 날에 왕이 둘 다에게 홍패와 어사화와 술을 하사하였으며, 문·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日傘)을 하사하였다. 그러다가 세조 때에 이르러 문과에는 일산을 주었고, 무과에는 기(旗)를 주어 유가 때 누구나 이를 분별할 수 있게 되자 무반들이 기뻐하지 않으므로 얼마 안 가서 폐지하고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성종 때는 흉년이 들자 생원·진사 유가만 금하게 하였다. 1492년(성종 23)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민휘(閔暉)가 아뢰기를, “올해 흉년이 들었는데, 금주(禁酒)를 하는 것은 백성들의 소비를 줄이고자 한 것입니다. 청컨대 유가를 금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생원·진사는 금할 수 있으나 문·무과는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성종실록』 23년 3월 30일).

숙종 때는 흉년으로 문·무과까지도 유가를 금지시켰다. 1695년(숙종 21)에 이러한 건의가 있자, 왕이 이를 윤허하였다(『숙종실록』 21년 9월 24일). 흉년 때 유가를 금하자고 한 것은 창기(唱妓)에게 풍악을 잡히는 일에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어 갖는 문희연도 마찬가지로 금단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에도 국상이 있거나 가뭄이나 흉년 같은 재난이 있을 때마다 유가를 금지시켰지만, 그 외에는 유가의 전통은 계속 이어져 왔다.

절차 및 내용

선비가 급제했다는 방문이 걸리면 유가를 하는데 세악수(細樂手), 광대, 그리고 재인(才人)을 동원한다. 광대란 창우(倡優)를 말한다. 비단옷에 초립을 쓰고 채화(綵花)를 꽂고 공작 깃털을 들고 난무(亂舞)를 하며 재담을 늘어놓는다. 재인은 줄을 타고 재주를 넘는 등 온갖 유희를 벌인다.

홍개(紅蓋)는 왕의 노부(鹵簿)에 쓰는 의장의 하나로, 붉은 생초(生綃)에 용무늬를 그려 넣은 일산이다. 문과 장원에게는 풍류와 함께 홍개를 내리어 유가할 때 앞세우고 다니는 특전을 주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급제자가 한양 거주자면 유가를 하지만 지방 출신이면 도문(到門)이라고 하여 60일간의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관리와 백성들의 환영 속에 부모를 찾아뵙고 문묘에 절한 후 거리를 행진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도문 이후 선산에 성묘하는 것을 소분(掃墳), 친구를 방문하기 위하여 마을길을 다니는 것을 유가, 유가할 때 광대들이 피리와 젓대로 앞길을 인도하는 것은 솔창(率傖), 가난한 친구들이 돈을 거두어 노비(路費)로 주는 것을 과부(科扶), 마을 앞과 선산에 화표(華表)를 세워 장식하는 것을 효죽(孝竹)이라 한다고 하였다. 효죽은 호남과 영남에서 주로 많이 사용하였고, 서북 지방에서는 사용한 예가 없었다.

참고문헌

  • 『경도잡지(京都雜誌)』
  • 『매천야록(梅泉野錄)』
  •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 『필원잡기(筆苑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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