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회(元會)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호조에서 관리하는 환곡으로 총액의 절반만 분급하고, 1/10의 이자를 징수함.

개설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중앙기관에서 환곡을 운영하는 기구는 호조뿐이었다. 1650년(효종 1) 호조에서 운영하는 환곡의 모곡(耗穀)에서 3/10을 떼어서 상평청에 이관하여 새로운 환곡을 창설하였다. 이른바 ‘삼분모회록(三分耗會錄)’이 시행된 것이었다. 환곡을 운영하면서 비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원곡의 1/10을 모곡의 명목으로 징수하여 환곡을 관리하는 지방관이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이 모곡의 30%를 정부에서 회수하여 새로운 환곡을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상평청을 선두로 환곡을 운영하는 기관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상평청은 재정기구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진휼청·선혜청·균역청 등의 중앙기관에서도 환곡을 운영하게 되었다. 호조 이외의 여러 중앙기관에서 환곡을 운영하게 되면서 호조의 환곡을 원회 혹은 ‘원회부(元會付)’, ‘원회부곡(元會付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회는 보유한 곡물의 절반은 창고에 유치해 두고 나머지 절반만을 분급하는 반류반분(半留半分)의 운영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모곡의 일부를 지방관이 사용할 수 있었고, 호조가 가져가는 모곡은 사직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원회곡은 18세기 이후 점차 줄어들었다. 원회는 지방의 감영·병영·수영 등에서 운영하던 환곡인 별회(別會)에 대응하는 용어이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650년에 상평청 환곡이 창설된 이후 17세기 후반의 빈번한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진휼청에서도 환곡을 운영하게 되었다.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환곡은 자연재해에 대처하기 위한 곡물이었다. 그러므로 호조 환곡인 원회와 상평청·진휼청 환곡은 흉년이 들었을 때에 농민에게 지급되거나, 굶어 죽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지급되기도 하였다. 상환해야 하는 환곡의 경우에도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갚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환곡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에는 탕감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원회곡은 점차 감소하였다. 상평청과 진휼청 환곡도 흉년이 들면 탕감하곤 하였지만 원회곡과는 달리 원곡을 보충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상평청과 진휼청 환곡은 분급한 원곡의 모곡 4/5를 다시 원곡에 첨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상평청 환곡은 원회곡의 모곡 일부를 지속적으로 이관받고 있어서 18세기 전반까지 급격히 액수가 증가하였다.

또한 원회와 상평청·진휼청 환곡은 모곡의 일부를 지방관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점은 18세기 후반에 비용 조달을 위해 환곡을 운영한 균역청·선혜청 등의 중앙기관의 환곡 운영과 차이점이었다.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환곡을 운영한 중앙기관은 모곡의 전부를 자체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지방관이 사용할 몫이 없었다.

변천

18세기 전반까지 환곡 운영의 중심을 이루었던 호조·상평청·진휼청의 환곡은 분급하였다가 큰 흉년이 들었을 때는 탕감해 주거나, 무상 분급하는 데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동일한 성격의 환곡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집성된 『여지도서』의 경기도와 함경도 일부 지역에서는 원회부를 진휼청곡·상평청곡·호조곡으로 파악한 경우도 있었고 ‘원회부삼아문곡(元會付三衙門穀)’으로 뭉뚱그려 파악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곡이 감소함에 따라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강화·경상도·강원도·평안도 등지에서 호조에서 관할하는 환곡임에도 불구하고 보유 곡물 전체를 분급하는 진분(盡分)으로 운영하는 환곡도 생겨났다. 그러나 그 액수는 미미했다.

19세기 전반 들어 1809년(순조 9)~1814년(순조 14)의 극심한 자연재해는 환곡의 감축을 초래했으며, 특히 원회곡은 존폐의 위기에 놓일 정도였다. 원회곡의 모곡으로 비용을 충당하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다른 기관의 곡물을 이전하기도 하였으며, 원곡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서 곡물을 빌어서 새로운 환곡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의의

호조 환곡인 원회는 전형적인 환곡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보유 곡물의 절반만을 분급하는 운영 형태와 흉년이 들었을 때에 탕감하거나, 무상 지급되는 곡물로 농민의 재생산 기반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8세기 이후 그 액수가 점차 감소하였고, 19세기에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원회의 변화를 통해서 환곡제도의 진휼 기능이 점차 축소되어 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목민심서(牧民心書)』
  • 문용식, 「조선후기 상진곡의 설치」, 『사총』 46 , 1997.
  •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2001.
  • 송찬식, 「이조시대 환자취모보용고」, 『역사학보』 27, 1965.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19, 1989.
  •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