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주(鬱鬯酒)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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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울창주 |
한글표제 | 울창주 |
한자표제 | 鬱鬯酒 |
관련어 | 강신(降神), 과지(祼地), 관지통(灌地筒), 모사기(茅沙器), 사지(沙池), 용찬(龍瓚), 울금초(鬱金草), 장찬(璋瓚), 종묘(宗廟) |
분야 | 왕실/왕실의례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 |
집필자 | 이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울창주(鬱鬯酒)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43년 6월 21일 |
종묘 제향에서 체백(體魄)을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향이 짙은 술.
개설
울창주는 기장으로 빚은 술에 삶은 울금초(鬱金草)를 섞어서 만든 술이다. 울금초의 향내가 독특하여 울창주는 국가의 최고 제례인 종묘 제향에서 선왕의 체백을 부를 때 사용하였다. 제향 때 울창주는 이(彛)라 부르는 술항아리에 담아서 용찬(龍瓚)이란 술잔에 채워 땅에 부었다. 울창주를 땅에 부어 신을 부르는 것을 관지(祼地, 灌地)라고 하였다. 종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주창(主鬯)이라고 부를 정도로 울창주는 종묘 제향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연원 및 변천
『주례(周禮)』 「춘관(春官)」에는 울인(鬱人)과 창인(鬯人)의 직책이 있다. 창인은 기장[秬]으로 만든 창주(鬯酒)를 제공하면 제사 때에 울인이 울금초를 삶아 창주에 섞어서 울창주를 만들었다. 이러한 울창주는 천신(天神)이나 산천, 사직(社稷) 등의 제향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종묘 제향에서만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울창주는 종묘 제향을 상징하는 술이었다. 이러한 울창주는 땅에 스며들어 연천(淵泉)에 이르러 체백을 부른다고 여겼다. 반면 쑥[蕭]을 서직과 함께 태워 양의 기운인 혼을 불렀다. 후대에 혼을 부르는 도구는 향(香)으로 바뀌었지만 울창주는 그대로 유지되어 종묘 제향의 특징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종묘 제향에서만 울창주를 사용하였다. 선왕에 대한 제사라도 문소전(文昭殿)이나 진전(眞殿)에서 치른 제사에서는 울창주가 보이지 않는다. 문선왕(文宣王) 등의 인귀(人鬼)에도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울창주를 사용하는 국가 제향이 늘어났다. 먼저 숙종대 신설된 대보단(大報壇) 제향에서 울창주를 사용하였다. 특히 대보단 제향에서는 명나라의 예식을 본받아 울창주를 관지통(祼地筒)이 아닌 사지(沙池)에 부었다. 또 한편 영조대부터 국가 제례로 정식화된 궁묘(宮廟)의 제향에서도 울창주를 사용하였다. 육상궁(毓祥宮)과 같이 생모나 생부를 모신 경우 제물의 진설이 속제(俗祭)인데도 울창주를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술로써 강신하는 절차가 조상 제사에서 일반화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형태
『국조오례의』에서는 기장의 하나인 흑서(黑黍)를 빚어서 술을 만들고 울금(鬱金)을 쌓아서 끓여 섞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멥쌀인 도미(稻米)로 술을 빚은 후 울금을 섞어 만들다가 1717년(숙종 43)에 규정대로 하였다(『숙종실록』 43년 6월 21일). 울창주를 땅에 붓는 것을 관지라고 하며 그 의식을 관례(祼禮) 또는 신관례(晨祼禮)라고 하였다. 울창주를 부어 땅에 스며들도록 제상(祭床) 앞에는 관지통(祼地筒)이란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민간에서는 울창주를 별도로 만들지 않지만 관지의 절차는 남아있다. 즉 향을 태운 다음 술을 모사기(茅沙器)에 부어 체백을 불렀다. 모사기란 시냇가의 정결한 모래를 잘 씻어서 그릇에 담고, 그 복판에 띠의 잎을 말린 것으로 만든 작은 다발을 꽂은 것이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