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사단기우의(雩祀壇祈雨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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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우사단(雩祀壇)에서 부정기적으로 시행했던 기우제 의식.

개설

조선시대 기우제단인 우사단에서는 매년 4월에 정기적인 제사가 이루어지는데 그 의식을 정리한 것이 예전(禮典)에 보이는 ‘우사의(雩祀儀)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기 제사의식 외에 여름철 가뭄이 심할 경우 우사단에서 급하게 시행되는 기우 의식이 별도로 만들어졌으니 이것이 ‘우사단기우의’이다.

우사단에서 부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기우제는 1414년(태종 14)에 처음 시행된 이후 조선 전 시기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었다. 국가의 제사 체계에서 4월에 시행되는 정기적인 우사제가 중사(中祀)의 등급인 반면 부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우사단기우제는 소사(小祀)로서 양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기우제의 특성상 부정기적인 우사단 기우제가 정기적인 우사제보다 더 주목받았고, 실제의 운영 역시 기우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연원 및 변천

우사단은 1414년(태종 14) 5월 14일에 흥인문(興仁門) 밖에 세워졌는데, 13일 후인 27일 우사단에 대신을 보내 비를 빌었다는(『태종실록』 14년 5월 27일)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이미 그 의식이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의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세종실록』「오례」 길례 의식에는 ‘우사의’와 ‘우사단기우의’가 별도로 수록되어 있어 후자를 통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세종실록』「오례」에 수록된 ‘우사단기우의’는 태종대의 의식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오례」의 ‘우사단기우의’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성종대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되었고, 이 상황은 숙종대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영조대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는 이 ‘우사단기우의’와는 별도로 ‘친향우사단기우의(親享雩祀壇祈雨儀)’가 수록되어 있다. 숙종대 이후 기우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농경 관련 제단인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선농단(先農壇), 악해독단(嶽海瀆壇), 우사단 등에서 시행되는 기우제에 왕이 참석하는 사례가 나타났는데,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제정된 것이 바로 ‘친향우사단기우의’이다. ‘친향우사단기우의’의 내용은 시행 주체가 왕이기 때문에 희생(犧牲)에 소와 양이 사용되고 참여 인원이 대폭 늘어나는 등 ‘우사단기우의’와 차이가 나지만 제사의 시행 방식은 양자가 비슷하였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우사단기우의’를 통해 의식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사단기우의’는 소사의 의식이기 때문에 중사의 의식인 ‘우사의’에 비하여 제수 및 참여 인원 등에서 축소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전체의 의식은 제사 전 준비과정과 제사 당일 실제 제사를 행하는 행례(行禮)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獻官)은 ‘우사의’가 3헌관으로 구성된 반면 ‘우사단기우의’에서는 2품관 1명으로 운영되었다. 제사의 경건함을 유지하는 행동인 재계(齋戒)는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 총 3일간 시행하였다. 산재는 제관(祭官)이 치재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일상 업무는 정상적으로 수행했으며 평소의 자기 집의 침소(寢所)에서 잤다. 치재는 산재 이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재계하는 것으로, 치재 기간에는 전적으로 제사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였다. 진설은 제수 및 헌관의 자리 등을 설치하는 것을 말하는데, 제사 1일 전부터 시행하였다. 제사 전날 헌관이 희생을 살폈는데, 희생은 돼지 1마리를 썼다. 신위는 구망(句芒), 욕수(蓐收), 현명(玄冥), 축융(祝融), 후토(后土), 후직(后稷) 등 여섯이다.

제사 의식은 신위에게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와 술을 올리는 작헌(酌獻)의 2단계로 구성되었다. 전폐는 폐백을 올리는 것으로, 먼저 구망의 신위에게 3번에 걸쳐 향을 피우는 삼상향(三上香) 뒤에 전폐를 행하고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다. 이후에 욕수→현명→축융→후토→후직의 차례로 폐백을 올린다.

전폐가 끝나면 술을 올리는 작헌례를 시행하였다. 먼저 헌관이 구망에게 술잔을 올린 뒤 엎드렸다가 일어선다. 이후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고, 끝나면 헌관이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다. 구망에 대한 작헌이 끝나면 욕수→현명→축융→후토→후직의 순서대로 작헌한다. ‘우사의’에서 작헌례가 3번 시행된 반면 ‘우사단기우의’에서는 1헌만을 시행하였다.

작헌례가 끝나면 헌관이 4배를 시행한다. 이후 제기가 거두어지고 헌관은 사용했던 폐백을 구덩이[坎]에 묻는 과정을 지켜본다. ‘우사단기우의’에는 제사 드린 술과 희생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과 수조(受胙)의 과정이 없다. 이후 신위판을 갈무리하고 제관들이 퇴장하면 의식이 종결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우사단의 기우제는 풍운뇌우(風雲雷雨), 악해독(嶽海瀆), 산천(山川), 성황(城隍) 등에서 시행되는 기우제와 연결되어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가뭄이 심해질 경우 유교적인 형태로만 운영되지 않고 민간의 염원을 수용하여 무당들이 주체가 되어 무속의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수서(隋書)』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예기(禮記)』
  • 『명집례(明集禮)』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 연구』, 일조각, 1991.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 한형주, 「성종-중종대 農桑 관련 국가제례의 변화양상과 祭儀」, 『역사와 실학』4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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