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사일기(外史日記)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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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외사일기 |
한글표제 | 외사일기 |
한자표제 | 外史日記 |
상위어 | 사관(史官), 외사(外史), 일기(日記) |
하위어 | 음청기(陰晴記) |
분야 | 정치/행정/문서·행정용어 |
유형 | 문헌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외사일기(外史日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0년 6월 25일, 『정조실록』 18년 3월 6일, 『정조실록』 4년 8월 15일 |
조선시대 지방에서 사관(史官)의 역할을 담당하던 외사(外史)가 작성한 일기.
개설
『외사일기(外史日記)』는 조선시대에 지방관 가운데 사관의 역할을 수행한 외사가 작성한 일기이다. 『외사일기』는 1515년(중종 10) 이후 본격적으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별로 혹은 월별로 작성되어 중앙에 보고되었으며, 이는 후일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때 활용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외사는 지방 행정 단위인 도(道)·부(府)·군(郡)·현(縣) 등에서 사관의 업무를 담당하던 관원을 말한다. 고려시대인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방 제도가 정비되면서 사록(司錄)이 설치되어 지방의 사실 정리를 담당하였는데, 이 사록이 외사의 일종이다. 따라서 『외사일기』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외사 설치가 논의되다가 1515년에 지방의 문신 수령과 관찰사수령관(首領官)인 도사(都事) 중 1~2명을 선발해서 외사를 겸임하게 하면서 본격화되었다(『중종실록』 10년 6월 25일). 외사를 겸임하는 지방관은 일기를 편수해서 보고하지 않으면 다른 관직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따라서 조선조에서 『외사일기』도 이 시기 이후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사의 설치는 지방 수령들의 정사에 대한 잘잘못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고, 일기는 이를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권선징악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지 사항
『외사일기』는 현재 전하는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서지 사항을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춘추관일기』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지방의 외사가 제출한 일기를 중앙의 춘추관 소속 기사관(記事官)이나 기주관(記注官) 등이 초록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 『춘추관일기』에 부속된 평안도 성천도호부사유모(柳某)가 작성한 일기를 보면 장계(狀啓)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외사일기』가 반드시 장계 형식으로 기록되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구성/내용
『외사일기』는 일별 또는 월별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사일기』는 해당 일자의 날씨를 비롯해서 지방의 풍속이나 백성의 물정, 풍속과 기타 기록할 만한 일들을 기록하였다(『정조실록』 18년 3월 6일). 후일 『조선왕조실록』에 등재할 만한 내용이 중심이 되었다. 날씨를 기록한 것은 따로 음청기(陰晴記)라 불리기도 하였다.
1793년(정조 17) 외사인 양구현감조덕윤(趙德潤)이 작성한 일기에는 머리와 꼬리는 말과 같고 눈은 소와 같은 생김새의 동물 발생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조덕윤의 보고에 대해 조정에서는 이를 이상적인 동물로 생각했던 기린(麒麟)으로 추정했으며, 이를 성인(聖人)이 왕위에 계시므로 상서로운 동물이 등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작성된 『외사일기』는 수령의 고과(考課)가 행해지는 6월과 12월에 1개월 단위로 보고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내용이 부실해져 정조 연간에 이르면 『외사일기』가 날씨의 흐림과 맑음,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등의 기후를 기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풍속 등에 대한 기록도 일기 형식에 어긋나게 뒤섞여있거나 격식이 뒤죽박죽이 되어 내용 파악이 어렵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정조는 호구 수의 기록을 엄밀하게 할 것과 일기 체제와 사례에 맞게 작성할 것을 지시하였다(『정조실록』 4년 8월 15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史官) 연구』, 국학자료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