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작통(사회)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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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오가작통 |
한글표제 | 오가작통 |
한자표제 | 五家作統 |
상위어 | 행정구역제도(行政區域制度) |
동의어 | 오호담당제(五戶擔當制), 오호작통제(五戶作統制) |
관련어 |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지방행정(地方行政), 통수(統首), 호적대장(戶籍臺帳), 준호구(準戶口), 호구단자(戶口單子), 호패(號牌), 인보정장제(隣保正長制), 이정(里正), 통주(統主) |
분야 | 사회/향촌/사회조직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단종~고종 |
집필자 | 김현영 |
시행시기 | 단종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오가작통(五家作統)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단종실록』 3년 1월 19일 |
조선시대에 호구를 파악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묶은 지방행정 제도.
개설
오가작통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28년(세종 10)의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나온다. 즉 “주나라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서울의 5부(五部) 각 방(坊)에는 다섯 집을 비(比)로 하여 비장(比長)을 두며, 성 밑 각 면(面)에는 서른 집을 이(里)로 하여 권농(勸農) 한 사람을 둘 것”[『세종실록』 10년 윤4월 8일]을 한성부에서 건의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55년(단종 3)에는 강도와 절도의 방지를 위하여 유품(儒品)과 유음자제(有蔭子弟)를 제외하고 평민의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조직하여 통 내에서 강도ㆍ절도를 은닉하는 것이 발각되면 통 전체를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입법하였다.(『단종실록』 3년 1월 19일) 1455년(세조 1) 에도 이 조항은 재확인 되었고, 1957년에는 저수 관개를 감독하기 위하여 8도 각 고을에 통주(統主)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자료들로 보아서, 오가작통은 단종 연간에 시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오가작통제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더욱 정비되어 법제화되었다. 『경국대전』「호전(戶典)」 호적조에 “서울과 지방 모두에 다섯 집을 한 통으로 하여 통에는 통주를, 지방에는 매 5통마다 이정(里正)을, 매 면마다 권농관을, 서울에는 매 일방(一坊)마다 관령(管領)을 둔다”고 규정되어 있다. 즉 호주-통주-이정-권농관-수령으로 이어지는 호구 지배 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련된 오가작통은 향약 또는 호패법 시행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운영되었다.
내용
(1) 호적, 가좌법(家座法)과 오가작통
조선 후기에 정부는 호적을 통하여 부세나 요역을 징수하고 민호(民戶)를 파악하였다. 따라서 매 식년(式年: 3년 마다인 자(子), 묘(卯), 오(午), 유(酉) 따위의 간지(干支)가 들어 있는 해)마다 호적을 작성하였으며, 호적 작성 시에는 각 읍의 향임 중에서 감관(監官)을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작성하였다. 각 호에서는 호구단자를 이정ㆍ면임에게 제출하고, 이정ㆍ면임은 이를 모아서 읍에 보냈다. 읍에서 이 호구단자를 토대로 옛 호적대장과 대조하여 새롭게 3부의 호적대장을 작성하면 한 부는 읍에, 한 부는 감영에, 한 부는 호조(또는 한성부)에서 보관하였다. 호적을 작성할 때에는 호적뿐만 아니라 가좌책(家座冊)이나 통기(統記, 또는 統戶成冊)를 보조 자료로 활용하였다.
(2) 환곡제와 오가작통
환곡 분급 규칙에는 “통기에 따라 평균하여 받아먹을 것[從統記 平均受食]”을 규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18세기 이후에는 환곡이 부세적인 성격으로 변질됨으로써 분급 대상의 확보와 안정적인 징수 방법으로 오가작통이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관에서는 통별원수성책(統別願受成冊)이나 호적, 통기를 조사하여 통수에게 환곡을 지급하여 이른바 통환(統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3) 군역ㆍ요역의 징발과 오가작통
효종 대의 「속오절목(束伍節目)」에서는 가좌 순서대로 작대(作隊)하여 통수와 면임이 군역과 요역의 징발에 관여하도록 하였다. 통수와 면임이 점차 국가의 지방 지배 조직에 편입되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금송(禁松)을 위한 조직에서도 통과의 결합이 나타났다.
(4) 권농과 오가작통
오가작통은 권농의 시행 단위로도 활용되었다. 이계(耳溪)홍양호(洪良浩)는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우성책(農牛成冊)」을 작성하여 통수를 중심으로 농우를 이용하여 영농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외에도 향풍 교화, 상부상조, 지역의 방수(防守)를 위한 조직으로도 활용되었다.
변천
조선 전기에 오가작통의 구체적인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보(隣保)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즉 모든 백성을 등록시켜서 법의 보호를 받도록 하고 거주지를 이동할 때에는 통ㆍ리를 거쳐 관의 허락을 받게 하였으며, 수상한 사람은 고발하도록 하였다. 또한 불효, 불제, 반란, 살인, 패속, 도적, 부도 등에 대한 고발을 의무화하였다. 이를 다섯 가구의 연대 책임으로 하였다. 둘째, 각 지역민의 이탈 방지책으로의 기능을 하였다. 유민 및 이민을 추쇄하고 감시하도록 하였다. 셋째, 환곡이나 진휼을 집행할 때 최소 단위 조직으로 기능하였다. 넷째, 향풍을 교정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오가작통의 실제적인 기능은 강도ㆍ절도 방지, 풍속 교화, 유민 및 호적 작성에서의 탈루자(脫漏者) 방지 등이었다. 그러나 실제 시행 과정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가작통 시행에 대한 계속적인 논의가 이를 말해 준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는 법제적으로는 존재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에 작성된 호적대장이나 호구단자, 준호구에는 오가작통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의 전란 후 국가의 민에 대한 지배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즉 군역제와 호적제 같은 대민 지배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에 인조 대 이후 지속적으로 호패법 시행이나 향약 보급, 오가작통법 강화를 통한 대민 지배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1625년(인조 3) 호패법이 시행되고, 호패법의 효과를 제고하기 위하여 최하 단위 조직인 오가통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효종ㆍ현종 대에도 북벌론과 관련하여 군역민의 확보를 위하여 지방제도 확립과 오가작통 시행이 촉구되었다. 현종 대에는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오가통상정절목(五家統詳定節目)」을 정하기도 하였다.
오가작통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시기는 숙종 대였다. 1675년(숙종 1) 윤휴(尹鑴)는 시무차자(時務箚子) 가운데에서 아약(兒弱)과 백골 같은 허액(虛額)으로 인한 민의 폐해를 방지하고 양정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오가작통을 건의하였다. 또한 비변사에서는 21개조의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오가작통사목」의 내용은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하여 통수의 관장을 받고, 5∼10통을 소리(小里), 11∼20통을 중리(中里), 21∼30통을 대리(大里)로 하여 이(里)에는 이정과 이유사(里有司) 각 1명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의 행정을 면에 귀속시켰는데, 면에는 도윤(都尹)과 부윤(副尹) 각 1명을 두어 이정을 지휘하게 하였고, 면윤(面尹)은 수령의 감독을 받도록 하였다. 「오가작통사목」이 제정된 1년 후에는 다시 「호패사목(號牌事目)」을 반포하여, 오가통제에서 시행되었던 지패(紙牌) 대신에 호패제로 환원시켰다.
이처럼 오랫동안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오가작통은 17세기에 이르러 정착된 면리제(面里制)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명실 공히 정부의 제도적인 뒷받침 아래 시행되었다. 이와 같이 「오가작통사목」의 내용에서 보이는 오가작통 시행의 표면적인 이유는 농경을 서로 도우며 환란을 상호 구제하는 데 있었지만, 실제로는 유민의 발생을 규제하고 각종 조세의 납부를 독려하는 것이었다.
영조 대에는 양역 문제와 관련하여, 숙종 대의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작업을 하면서 오가통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영조 대에 수정된 「양역변통절목」에서는 통수를 가호의 순서에 따라 1년씩 차례로 돌아가며 맡고, 통 내의 다섯 가구가 서로 지켜서 유망하지 않도록 하며, 통수는 출입자에 대해 면임을 통하여 바로 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말기에 시행된 오가작통도 사실은 조선 전기의 오가작통 취지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즉 조선 말기의 오가작통의 기능도 인보 조직으로서의 성격, 부세 수취ㆍ권농 및 요역 징발에서의 활용, 정확한 호구 파악 등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도 오가작통은 결코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 국가의 지배력이 전통적인 생활 공동체로서의 자연촌의 강인한 질서를 해체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가작통의 시행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강화와 이완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와 동학의 금압과 교도의 색출을 위하여 일부 집권층에 의하여 강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정에서 1884년(고종 21)에는 내무부의 건의에 따라 「오가작통절목(五家作統節目)」이 마련되었다. 1896년(고종 33)에는 전국의 호적을 작성하는 데 10가구가 한 통으로 편성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오영교, 『조선후기 향촌지배정책 연구』, 혜안, 2001
- 신정희, 「오가작통법소고」, 『대구사학』12ㆍ13, 1977
- 오영교, 「19세기 사회변동과 오가작통제의 전개과정」, 『학림』12ㆍ13, 1991
- 오영교, 「조선 후기 오가작통제의 구조와 전개」, 『동방학지』73, 1991
- 신영우, 「갑오농민전쟁 이후 영남 북서부 양반지배층의 농민통제책」, 『충북사학』5, 1992
- 정진영, 「조선후기 국가의 촌락 지배와 그 한계」, 『교남사학』6,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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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찬, 「을미의병 지도부의 1894년 반동학군 활동」, 『규장각』18, 1995
- 오영교, 「17세기 조선왕조의 향촌지배정책의 추이」, 『매지론총』13, 1996
- 권내현, 「숙종대 지방통치론의 전개와 정책 운영」, 『역사와 현실』25, 1997
- 오영교, 「18세기 원주목의 행정체계와 향촌조직의 운영」, 『한국사연구』104, 1999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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