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역(連洞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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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평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가평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연동역(連洞驛)은 고려시대에는 춘주도(春州道)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경기도의 역도(驛道)평구도(平丘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는 사실이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 확인된다. 그 뒤 성종대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도 기존과 같이 평구도에 소속된 것으로 나와 있다. 경기도 가평현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춘주도에 소속된 24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경기도 가평군에 해당되는 조종(朝宗)에 위치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춘주도에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가평군지지에 따르면, 당시 연동역에는 역리(驛吏) 10명, 역노(驛奴) 13명, 역비(驛婢) 3명과, 대마 1필, 기마 1필, 복마 3필 등 총 5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1461년(세조 7)에는 세조가 율장(栗長)에서 강무를 행한 뒤 저녁에 연동역 인근 벌에서 유숙하였으며(『세조실록』 7년 3월 1일), 1479년(성종 10)에는 성종이 군대를 사열한 다음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0년 10월 6일).

변천

조선 세종대에는 전국적으로 역로를 재조직하였는데, 연동역은 평구도에 소속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그 뒤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도 별다른 변화 없이 평구도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고려사』「병지」 참역 조에는 역명이 연동역(連同驛)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세종실록』「지리지」와 『경국대전』 등에는 연동역(連洞驛)으로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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