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역(梁文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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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평구도에 속한 역.

개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양문역(梁文驛)은 경기도와 강원도를 연결하는 역도(驛道)인 경기강원도정역찰방의 관할 하에 편성되었다. 그 뒤 성종대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평구도(平丘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역참은 중앙과 지방 사이에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진상품 등 공공 물자를 운송하며, 왕래하는 사신을 접대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 설립한 육상 교통 기관이었다. 양문역 역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조선시대 경기 지역에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에는 역역(驛役)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역참에 역리(驛吏)와 역노비(驛奴婢) 등을 포함한 다양한 역민(驛民)을 편성하였으며, 역의 재정에 충당하도록 역위전(驛位田) 또는 마전(馬田)을 지급하였다. 양문역의 경우, 1420년(세종 2)에 정역(正役) 10명과 봉족(奉足) 2명이 전운노비로 지급되었다(『세종실록』 2년 8월 12일). 또한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기도 영평현 조에 따르면, 당시 양문역에는 역리(驛吏) 47명, 역노(驛奴) 19명, 역비(驛婢) 56명과, 대마 3필, 중마 4필, 하마 3필 등 총 10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24년(세종 6)에 평구도에 속해 있던 양문역·녹양역(綠楊驛)·안기역(安奇驛)과 은계도에 속해 있던 은계역(銀溪驛)이 통합되어 경기강원도정역찰방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뒤 1465년(세조 11)에는 녹양역 등과 함께 평구도에 소속되어 평구도찰방의 관할이 되었다. 이어 성종대에 『경국대전』 반포 당시의 역도 체제에서도 변함없이 평구도에 소속되었다. 양문역은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양문역은 영평현 동쪽 1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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