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송(雅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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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의 ‘아’와 ‘송’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아(雅)’는 『시경』의 대아(大雅)·소아(小雅)를 이르는 말로, 주나라 때 조정에서 연주한 아악(雅樂)을 가리킨다. ‘송(頌)’은 『시경』의 주송(周頌)·상송(商頌)·노송(魯頌)을 가리키는 말로, 선조(先祖)의 공덕(功德)을 찬양하는 종묘악(宗廟樂)을 뜻한다. 결국 아송(雅頌)은 주나라 태평성대의 악곡으로, 나중에는 훌륭한 시가(詩歌)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논어』「자한(子罕)」에는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야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와 송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吾自衛反魯 樂正 雅頌各得其所]"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여기서 비롯되어 아와 송이 제자리를 얻는다는 표현은 정치 질서가 안정되고 사회도덕이 제자리를 잡는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표현은 불가(佛家)에서도 사용되었다. 『삼국유사』「자장정률(子藏定律)」에서는 자장이 불법(佛法)을 널리 퍼뜨린 덕에 국가에서 불법이 융성하도록 보호하게 된 것을 두고, "마치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아 아송이 각기 그 마땅함을 얻음과 같았다."고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 정조는 주자의 서적을 간행하여 주자학을 진작시키려고 하였는데, 1799년(정조 23)에는 직접 주자의 시를 뽑고 사신(詞臣)들로 하여금 주해(註解)를 달게 하여 『아송(雅誦)』을 엮었다. 정조는 시도(詩道)야말로 정치 교화의 성패에 직결된다면서, 근래의 시가 날이 갈수록 낮고 슬픈 음조를 띠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래서 옛날의 순박했던 시로 되돌릴 방법을 생각한 끝에 주자의 시를 뽑아 『아송』을 만들었다고 하였다(『정조실록』 23년 12월 28일). 『아송』은 주자의 탄일에 맞추어 1799년 9월 15일에 그 첫 권이 인간(印刊)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3일에 8권으로 완성되었다. 『아송』은 주자의 시를 시체(詩體)에 따라 나누어 선발·수록하였으며, 여기에 명(銘)·잠(箴)·찬(贊)·제(題)·사(辭) 등과 「삼선생사문(三先生祠文)」·「권학문(勸學文)」을 덧붙였다. 시의 원문은 『주자대전』을 그대로 따랐으며, 주석은 주자의 원주(原注)를 기본으로 하되 인명·지명·시사·실적 등을 중심으로 달았다. 정조는 경연(經筵)서연(書筵)에서 이 책을 강의하게 하였으며, 매달 유생들의 진척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에 이 책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강혜선, 「정조의 문예진흥과 시문선집의 편찬」, 『국제 고려학회』1,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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