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창궁(淑昌宮)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조의 후궁인 원빈홍씨의 궁호(宮號) 또는 거처.

개설

정조의 후궁 원빈홍씨(元嬪洪氏)는 홍낙춘(洪樂春)의 딸이자 홍국영(洪國榮)의 동생이었다. 원빈홍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창(淑昌)이라는 두 글자의 궁호를 받았다. 이에 따라 숙창궁은 원빈홍씨의 궁호 또는 거처를 의미하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숙창궁은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숙창궁 홍씨의 거처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1778년(정조 2)부터 숙창궁으로 불린 홍씨는(『정조실록』 2년 6월 21일) 1779년(정조 3)에 사망할 때까지 1년간 숙창궁으로 생존하였다. 그 1년 동안 숙창궁 홍씨는 여러 건물에서 생활하였는데, 마지막 거처는 창덕궁의 양심합(養心閤)이었다. 「동궐도(東闕圖)」에 의하면 양심합은 대조전(大造殿) 앞쪽 행랑에 위치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시대 궁(宮)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국왕이 상주하는 거주지로서의 궁인데 경복궁, 창덕궁 등이 그런 예이다. 둘째는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 그리고 후궁 등에게 붙는 존칭으로서의 궁인데 동궁, 빈궁, 세손궁, 세손빈궁, 후궁 등이 그런 예이다. 세 번째는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후궁 등의 사당 명칭으로서의 궁인데 경모궁, 육상궁 등이 그런 예이다. 네 번째는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거처인 잠저의 명칭으로서의 궁인데 어의궁 등이 그런 예이다.

이 중에서 숙창궁은 숙창(淑昌)과 궁(宮)의 합성어로서 이때의 숙창은 휘호 또는 궁호이고, 궁은 존칭으로서의 궁이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관행을 이어받아 왕비, 세자빈, 후궁 등에게 모두 휘호 또는 궁호가 있었다. 예컨대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가 정비(靜妃)로 불리고, 의경세자의 빈(嬪)이 수빈(粹嬪)으로 불리며, 세종의 후궁 김씨(金氏)가 신빈(愼嬪)으로 불린 것 등이 그런 예이다. 그런데 세자빈과 왕의 후궁 중 빈의 경우 모두 빈으로 불리기에 여기에 휘호를 붙이면 세자빈과 왕의 후궁 사이에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예종대부터 왕비, 세자빈, 후궁 등에게 휘호를 붙이는 관행이 사라졌다.

하지만 영조대에 이르러 세자빈에게 휘호를 붙이는 관행이 다시 부활하였다. 그것은 효장세자(孝章世子) 때문이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맏아들로서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소생이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이며, 빈궁은 조문명(趙文命)의 딸인 조씨이다. 1728년(영조 4)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7년째인 1735년(영조 11) 3월 16일에 영조는 세자빈 조씨에게 현(賢)이라는 휘호를 주었는데, 그 이유는 훗날의 사도세자가 되는 원자가 1월 21일에 출생했기 때문이었다(『영조실록』 11년 3월 16일). 장차 원자가 세자가 되고 세자빈을 맞이할 경우, 세자빈 조씨와 혼동될 것을 우려한 영조가 미리 세자빈 조씨에게 휘호를 부여함으로써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세자빈 또는 후궁에게도 휘호를 주는 관행이 정착되었는데, 정조의 후궁 원빈홍씨에게 숙창이라는 궁호가 주어진 것 역시 그런 예였다.

형태

「동궐도」에 의하면 원빈홍씨의 마지막 거처였던 창덕궁 양심합은 대조전의 남쪽 행랑에 위치한 남향의 건물로 총 3칸으로 구성된 한옥 건물이었다. 창덕궁의 중궁인 대조전을 비롯하여 그 앞쪽 행랑에 위치한 양심합은 왕비와 후궁 등을 위한 내전으로 이용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원빈홍씨가 세상을 떠난 양심합은 현종이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소장등록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소장의궤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koreanhistor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