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최씨(淑嬪崔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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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숙빈최씨 |
한글표제 | 숙빈최씨 |
한자표제 | 淑嬪崔氏 |
분야 | 왕족/후궁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현종~숙종 |
집필자 | 김가람, 황선희 |
호 | 육상(毓祥) |
봉작 | 숙빈(淑嬪) |
시호 | 화경(和敬)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670년(현종 11) |
사망 | 1718년(숙종 44) |
본관 | 해주(海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
증조부 | 최말정(崔末貞) |
조부 | 최태일(崔泰逸) |
부 | 최효원(崔孝元) |
모_외조 | 홍계남(洪繼南)의 딸 |
처_장인 | 숙종(肅宗) →(자녀)3남 |
자녀 | (1자)이영수(李永壽) (2자)영조(英祖) (3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숙빈최씨(淑嬪崔氏) |
총론
[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 = 49세].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肅宗)의 후궁이자, 21대 왕인 영조(英祖)의 어머니.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최효원(崔孝元)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홍계남(洪繼南)의 딸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숙종의 후궁
최숙빈의 궁녀 시절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최숙빈의 신분이 무수리였다는 설인데, 무수리는 궁에서 물을 긷는 일을 비롯하여 온갖 잡일을 담당하는 이들로서, 품계를 받는 일반적인 궁녀와는 차이가 있었다. 즉 품계를 받지 못하는 천한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조가 생모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상당했었다는 설이 존재하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고종(高宗)이 자신의 후궁들에게 영조가 최숙빈에게 침방에서 근무할 때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는지를 물었다는 얘기를 해줬다는 것과 아울러 최숙빈이 7세 때에 뽑혀서 궁에 들어왔다는 기록을 들어, 최숙빈이 무수리가 아닌 정식 궁녀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한편 최숙빈은 숙종 대의 인현왕후(仁顯王后)와 장희빈(張禧嬪氏)으로 대표되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정치 다툼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89년(숙종 15)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元子)로 삼는 것을 둘러싸고 벌어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서인들이 축출되었고, 이어 인현왕후가 폐출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5년 4월 22일, 숙종 15년 5월 2일] 그리고 얼마 후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면서, 기사환국은 남인의 승리로 끝이 났다.[『숙종실록』숙종 15년 5월 6일, 숙종 15년 5월 13일]
이러한 상황에서 서인 측이 새로 내세운 인물이 바로 최숙빈이었다. 숙종은 장희빈 이후 오랫동안 후궁을 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1693년(숙종 19) 4월 회임을 한 최숙빈에게 숙원(淑媛)의 첩지를 내린 것이다.[『숙종실록』숙종 19년 4월 26일] 그리고 그 해 10월 최숙빈이 아들 이영수(李永壽)를 낳았다.[『숙종실록』숙종 19년 10월 6일] 비록 이영수는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고 말았지만, 이때 최숙빈은 다시 회임을 한 상태였다.[『숙종실록』숙종 19년 12월 13일] 즉 장희빈에게 집중되어 있던 숙종의 관심이 최숙빈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감지한 서인 측에서는 최숙빈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 들였다. 아울러 1694년(숙종 20) 당시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老論)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少論)의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하면서,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숙종은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복위시키는 동시에 한 나라에 두 왕비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12일]
한편 인현왕후가 복위한 그해 6월 최숙빈은 숙의(淑儀)의 품계를 받았으며, 이어 9월에는 훗날 영조(英祖)가 되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낳았다.[『숙종실록』숙종 20년 6월 2일, 숙종 20년 9월 20일] 또한 1695년(숙종 21)에는 귀인(貴人)으로 품계가 올랐고, 1699년(숙종 25)에는 단종의 복위를 기념하여 숙빈(淑嬪)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1년 6월 8일, 숙종 25년 10월 23일]
그러던 가운데 1701년(숙종 27) 8월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났고, 인현왕후의 상장례를 놓고 장희빈이 왕비였으므로 다른 후궁들과 복제가 달라야 한다며 장희빈이 왕비였다는 사실을 다시 언급하는 이들이 등장하였다.[『숙종실록』숙종 27년 8월 14일, 숙종 27년 8월 27일] 이는 장희빈의 왕비 복위와 연결될 수 있는 문제였으므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과 노론의 측에 있던 최숙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숙종은 그해 9월 장희빈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就善堂)의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으며, 이 때문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결국 장희빈의 측근들은 모진 고문 등으로 사망하였고, 장희빈 역시 자진(自盡)의 명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숙종실록』숙종 27년 9월 25일, 숙종 27년 10월 8일, 숙종 27년 10월 10일]
장희빈이 세상을 떠난 이후 노론은 조정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강력한 권력을 차지하였다. 그러면서 남인과의 당파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최숙빈은 더 이상의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716년(숙종 42) 최숙빈은 건강이 약화되어 대궐과 한때 숙빈방(淑嬪房)이었던 창의동에 위치한 연잉군의 사저를 오고 가며 3년여 동안 병을 치료하다가 1718년(숙종 44) 사저에서 떠나니, 당시 나이 49세였다.[『숙종실록』숙종 37년 6월 22일, 숙종 44년 3월 9일, 『숙빈최씨신도비문』]
영조의 숙빈최씨 추숭(追崇)
1720년(경종 즉위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경종(景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한동안 잠잠하였던 당파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노론이 강력한 압력으로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한 것에 이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는 결국 <신임사화(辛壬士禍)>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 1년 9월 26일, 경종 1년 10월 10일] 이때 연잉군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과 임인옥안(壬寅獄案) 등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나, 소론 온건파와 남인 청류당(淸流黨)의 도움을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경종실록』경종 2년 3월 27일, 경종 2년 5월 13일, 『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7년 9월 25일] 그리고 1724년(영조 즉위년) 연잉군은 조선의 19대 왕인 영조로 즉위하였다.[『영조실록』영조 즉위년 8월 30일]
영조의 최숙빈 추숭 과정은 즉위 직후부터 이루어졌다. 그해 9월 영조는 인조(仁祖)의 할머니로 추증왕 진종(眞宗)의 생모인 김인빈(金仁嬪)의 예에 따라 최숙빈의 사당을 세우고, 묘역을 넓혀 수호인(守護人)을 두기로 한 것이다.[『영조실록』영조 즉위년 9월 21일] 이어 이듬해인 1725년(영조 1) 1월 최숙빈의 사당을 완성하고 숙빈묘(淑嬪廟)라 하였으며, 1744년(영조 20)에 육상묘(毓祥廟)로 개칭하였다.[『영조실록』영조 1년 12월 23일] 그리고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영조는 1753년(영조 29) 본격적인 최숙빈 추숭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해 6월 영조는 묘(廟)는 궁(宮)으로, 묘(墓)는 원(園)으로 승격시켰던 것이다. 그러면서 최숙빈에게는 화경(和敬)이라는 시호(諡號)가 추시(追諡)되었으며, 묘호(廟號)는 육상묘에서 육상궁(毓祥宮)으로 바뀌었고, 원호(園號)는 소녕묘(昭寧墓)에서 소녕원(昭寧園)으로 바뀌었다.[『영조실록』영조 29년 6월 25일] 이는 최숙빈이 임금을 낳은 어머니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품과 일화
최숙빈의 성품에 대해서는 침착하고 간묵(簡黙)하여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여러 빈과 궁인을 만날 때에는 언제나 겸손하고 온화하여 그들의 환심을 샀다고 전해진다. 또한 시중드는 이들이 다른 이의 장단점을 말할 때면 따끔하게 훈계하고 꾸짖어서 대궐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최숙빈을 칭찬하였다고 한다.[『숙빈최씨신도비문』]
한편 최숙빈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에 이들의 당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니만큼 인현왕후 및 장희빈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인현왕후가 폐출되었을 당시 숙종이 후원을 거닐다가 불빛이 있는 방이 있어 들어가니 떡과 음식을 차려 놓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숙종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묻자 그 사람이 자신은 인현왕후의 시녀인데, 다음날이 인현왕후의 생일이라 떡과 음식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하였고, 이 사람이 바로 최숙빈이었다. 이에 숙종이 최숙빈을 가상히 여겨 총애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수문록(隨聞錄)』] 이 외에도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빗대어 만든 김만중(金萬重)의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숙종에게 읽어 주어, 숙종이 마음을 움직인 사람도 최숙빈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묘소와 후손
영조 대에 조성된 육상궁은 1870년(고종 7) 최숙빈 외에도 장희빈과 이정빈(李靖嬪), 이영빈(李暎嬪) 그리고 성의빈(成宜嬪)의 신주를 별묘(別廟)에 모시게 되었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그러다가 1872년(고종 19) 8월 육상궁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영조 대에 조성한 육상궁은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종실록』 고종 19년 8월 1일, 고종 20년 6월 24일] 이어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다른 후궁들의 신주도 육상궁으로 옮겨졌고,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게 되었다.[『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23일]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최숙빈의 묘소인 소녕원(昭寧園)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동에 있으며, 묘소 주변에는 곡장 및 혼유석, 문인석 등의 여러 석물들과 정자각, 그리고 영조가 직접 작성한 묘비가 남아 있다. 1991년에 사적 제358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최숙빈은 숙종과의 사이에서 3남을 두었는데, 1남은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죽은 이영수이고, 2남은 영조이다. 3남 또한 어려서 잃었다.[『숙빈최씨신도비문』]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금계필담(金溪筆談)』
- 『수문록(隨聞錄)』
- 『수촌집(水村集)』
- 『숙빈최씨묘비문(淑嬪崔氏墓碑文)』
- 『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 『두산백과』
- 『민족문화대백과』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
-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5.
- 박영규, 『환관과 궁녀』, 웅진 지식하우스, 2009.
-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이왕무, 「영조의 사친궁·원 조성과 행행」, 『장서각』15,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