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受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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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술자리 정도의 매우 조촐한 연향.

개설

1765년(영조 41)은 영조가 72세가 되는 해이자 즉위한 지 만 40년을 넘긴 해였다. 이에 왕세손과 종친 및 대신들이 이를 경축하는 연향을 올리기를 청하였다. 영조는 여러 차례 거절하다가 부득이 허락하면서, 검소하게 준비하라는 단서를 달고 이 행사는 연향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라 조그만 술자리라는 의미로 ‘수작(受爵)’이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는데, 이때 외에는 수작이라는 명칭으로 연향이 행해진 적이 없다.

내용 및 변천

수작이 조선시대에 연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사례는 1765년에 왕에게 올린 연향이 유일하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술잔을 받는다는 뜻인 수작은 연향을 받는 입장에서 쓴 용어이므로, 연향을 올리는 입장에서는 진작(進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작이 진찬(進饌)보다 규모가 작은 예연(禮宴)을 뜻하는 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1827년(순조 27)의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부터이다.

수작과 진작은 용어 자체의 의미로만 보면 연향을 받는 사람과 올리는 사람의 입장 차이만 있을 뿐 같은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연향 규모에서는 차이가 컸다. 진작은 진찬보다 작은 규모의 예연이지만, 수작은 진찬이나 진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촐한 잔치였다.

1765년은 영조가 72세 되는 해이자 즉위한 지 만 40년을 넘긴 해이므로, 왕세손과 종친 및 대신들이 이를 경축하는 연향을 올릴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다. 영조는 10월 4일에 부득이 이를 허락하면서 검소하게 준비하도록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유밀과와 단술을 베풀지 말고, 어찬(御饌)은 열 그릇을 넘지 않게 하며, 9작의 예를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때 ‘작(爵)’은 술을 담는 술잔을 가리키는 말로, 외연(外宴)에서는 대개 9작의 예를 행하고 내연(內宴)에서는 7작 이하의 예를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영조는 연향을 크게 벌이는 것을 경계하여 “이 행사는 연향이 아니다[此非宴也].”라고 강조하였고(『영조실록』 41년 10월 4일), 『영조실록』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왕이 경현당에 납시어 친히 작을 받으셨다.”라고 표현했다(『영조실록』 41년 10월 11일). 따라서 이를 기록한 의궤의 명칭도 『수작의궤(受爵儀軌)』라고 이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연향을 치르기로 결정하면 대개 2~3개월 전부터 준비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1765년의 수작은 허락을 받고 1주일 만에 행사를 치를 정도로 매우 조촐하였다. 또 연향에서는 장수를 기원하며 술을 올리는 절차가 핵심인데, 이때는 특별히 술 대신 생강차를 올렸다.

1765년 수작의 상차림을 1828년(순조 28) 진작의 상차림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간소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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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을유수작의궤(乙酉受爵儀軌)』
  • 『순조무자진작의궤(純祖戊子進爵儀軌)』
  • 김종수, 「영조 41년 보령 70세 경축 연향과 『(乙酉)受爵儀軌』」, 『규장각소장의궤 해제집1』,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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