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당(壽仁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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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의 대비전.

개설

수인당은 1897년경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건립 이후 명헌태후(明憲太后)인 효정왕후(孝定王后)남양홍씨의 처소로 사용되었다(『고종실록』 41년 1월 2일). 1933년경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위치 및 용도

수인당은 경운궁의 동북쪽 언덕 위에 위치했던 건물로 효정왕후의 처소였다. 동쪽에는 ㅁ자형 평면의 양심당(養心堂)이 있고,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이 있으며, 남쪽에는 순헌귀비 엄씨의 침소인 영복당(永福堂)이 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시대 궁궐에서 대비의 전각 혹은 궁은 동쪽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은 중국 한나라 태조가 장안(長安)을 수도로 삼고 미앙궁(未央宮)과 장락궁(長樂宮)을 건립했는데, 장락궁을 미앙궁의 동쪽에 위치시키고 이곳에 태후를 모시게 한 데서 연유한다. 1667년(현종 8) 창덕궁에 대비전이라 할 수 있는 집상전(集祥殿)을 새로 조성했는데 “자전께서 정전(正殿)에 임어하시지 못한 지 지금 이미 반년이나 되었으니 우선 옛 궁궐에서 한 칸을 헐어다가 전(殿) 동쪽의 옛터에다 건립하고자 한다.”고 하였다(『현종실록』 8년 11월 11일). 이러한 사례는 1655년(효종 6)에도 나타난다. 당시 대비는 창덕궁 수정당(壽靜堂)에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효종은 수정당이 산을 등지고 있고 비좁아서 궁색하다며 창덕궁의 서쪽인 흠경각(欽敬閣) 터에다가 전각을 만들어 대비를 모시고자 하였다. 이에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은 “예로부터 태후가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대내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조(東朝)라고 했습니다. 창경궁이 동쪽에 있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정전의 서쪽 구석으로 외부 가까운 자리에 옮겨 짓는 것은 굽어져 있는 데다 또 멀며, 좌측을 숭상하는[尙左之義] 고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대비전을 옮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효종실록』 6년 12월 4일).

경운궁의 동북쪽에는 많은 내전들이 위치하고 있는데 수인당은 그중에서도 후면 언덕 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수인당은 1897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나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날짜는 가늠하기 어렵다. 수인당은 효정왕후의 처소로 사용되었는데 효정왕후는 헌종의 계비로 후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태후인 명헌태후(明憲太后)가 되었다. 명헌태후는 수인당에서 승하하였고, 빈전은 흥덕전(興德殿), 혼전(魂殿)문경전(文慶殿)을 사용했으며, 전호는 효혜(孝惠)라고 하였다.

고종황제 승하 이후에도 수인당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으나, 경운궁이 중앙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공개되는 시점인 1933년 전후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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